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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굿 &#8211; 사이:비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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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칼럼] 신과 인간이 마주하는 무대, ‘한 끗 차이’의 연출을 묻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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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구수정]]></dc:creator>
		<pubDate>Wed, 01 Jul 2026 07:34:32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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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2026년 6월 전국에서 굿잔치가 벌어졌다. 5일 국악의 날을 맞아 굿을 소재로 하거나 굿을 무대에 올리는 작품이 꽤 나타난다. 국립남도국악원에서 ‘굿음악축제’&#46;&#46;&#46;</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b9%bc%eb%9f%bc-%ec%8b%a0%ea%b3%bc-%ec%9d%b8%ea%b0%84%ec%9d%b4-%eb%a7%88%ec%a3%bc%ed%95%98%eb%8a%94-%eb%ac%b4%eb%8c%80-%ed%95%9c-%eb%81%97-%ec%b0%a8%ec%9d%b4%ec%9d%98-%ec%97%b0/">[칼럼] 신과 인간이 마주하는 무대, ‘한 끗 차이’의 연출을 묻다</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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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2026년 6월 전국에서 굿잔치가 벌어졌다. 5일 국악의 날을 맞아 굿을 소재로 하거나 굿을 무대에 올리는 작품이 꽤 나타난다. 국립남도국악원에서 ‘굿음악축제’ 일환으로 진도, 동해안, 제주 지역의 저승혼사굿을 무대에 올렸다. 국가유산진흥원의 ‘이 땅의 굿’ 시리즈로 &lt;무악대전&gt;이 민속극장 풍류에서 3일간 펼쳐졌다. 해원과 축원의 밤으로 충청도의 독경부터 전라도, 강원도의 무악, 공동체의 신명과 위로라는 주제로 경기도, 경상도(남해안)굿, 마지막 날에는 신과 인간이 마주하는 장엄한 위용으로 황해도 솟을굿이 연행되었다. 광무대에서 각 지역의 예인을 초청하는 &lt;살아 있는 시간, 길 위의 명인&gt;에서는 강릉단오굿의 빈순애 무당이 ‘축원굿’을 연행하였고, 고창농악의 당산굿 등을 영화와 미디어아트 등의 융복합으로 &lt;시네마X굿 레퍼토리:샤이닝&gt;이 극장에서 펼쳐지기도 했다.</p>



<p class="wp-block-paragraph">공개된 큰 굿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단옷날을 중심으로 하는 강릉단오제가 강릉 남대천 등에서 15일부터 22일 연행되었다. 28일에는 제주 큰 굿인 삼시왕맞이가 칠머리당영등굿 전수관에서 하루 온종일 열렸다.</p>



<p class="wp-block-paragraph">굿을 소재로 하는 창작물도 눈에 띈다. 국악앙상블 불세출의 동해안 오구굿 장단을 기반으로 한 &lt;밤쩌&gt;가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작은 마당에서, 거창의 아시아 1인극제에서 방지원의 &lt;영등굿:북해본풀이&gt;가 올랐다. 2026 국제샤머니즘학회에서 강릉단오굿과 남해안별신굿을 소재로 한 &lt;The강남&gt;, 동해안별신굿을 기반으로 블루찬트의 &lt;BIRTH: My Innermost Rite&gt;가 소개되기도 했다. 음악가와 무당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굿은 그야말로 창작의 샘이자 무대에서 막차를 탄 전통예술이라 할 수 있겠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15"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ss-700x415.png" alt="sss" class="wp-image-4210" title="[칼럼] 신과 인간이 마주하는 무대, ‘한 끗 차이’의 연출을 묻다 1"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ss-700x415.pn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ss-300x178.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ss-150x89.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ss-768x456.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ss-1536x911.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ss-2048x1215.png 2048w" sizes="(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이렇게 공을 들여 6월에 열린 굿 관련 공연을 나열하는 이유는 제목과 장소만 훑어도 공연예술 분야에서 굿이 지금 어떤 형태로 소비되는지를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굿의 무대화에 대해 논의되어야 할 지점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는 창작 작품은 일단 제쳐두고 무당과 악사가 중심이 되는 전통적 방식의 공연굿으로 한정하려 한다. 이 공연굿은 무대라는 공연예술의 기반 위에서 연행되기 때문에 평론의 범위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decoding="async" width="500"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3-500x500.jpg" alt="8613" class="wp-image-4211" title="[칼럼] 신과 인간이 마주하는 무대, ‘한 끗 차이’의 연출을 묻다 2"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3-500x500.jpg 5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3-300x3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3-150x15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3-768x768.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3-1536x1536.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3.jpg 2048w" sizes="(max-width: 500px) 100vw, 500px" /></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공연굿은 그야말로 무당의 주도 하에 실제 굿이 아닌 공연처럼 이루어지는 굿을 말한다. 뚜렷한 기주(굿 의뢰자)가 없을 수도 있고, 망자천도굿일 경우 망자 없거나 가상 망자를 세울 수도 있다. 공연굿의 시작은 여러 환경적 영향이 있겠지만 과거 무형 유산(옛 무형문화재)의 지정이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다. 1980년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등의 굿이 무형 유산 종목으로 지정된 이후 무형 유산의 전승과 보존이라는 취지에서 굿은 인위적인 환경에서의 제한된 형태를 가졌다. 당시 미신으로 몰고 폐해를 지탄하는 환경 속에서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굿의 예술적 측면을 부각시켜 전통이라는 바구니 안에 넣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조바심을 잠재운 것이다.(박미경, 2011) 굿의 유지 배경과 후계 지정의 평가를 무대공연의 방식으로 거치게 되면서 점점 고착화 되었다. 이미 굿이 가진 종교와 삶의 의례성은 퇴색된 지 오래였다. 이런 흐름은 예견된 것이므로 지금에 와서 옳고 그름을 논할 이유는 없다. 그저 현상이 어떻게 변화해오고 있는지 관찰할 따름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벌써 40여년이 흘렀다. 굿의 공연화는 이제 굿의 한 부분으로 인정해야 할 지경이다. 진짜 굿을 벌일 기회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이를테면 미혼의 망자를 위한 망자혼사굿도 굿의 수요가 없었으며, 올해 망자혼사굿을 벌인 제주의 오용부 심방, 동해안굿의 김영숙 무당 등도 30여년 전에 했던 기억을 끄집어내야 할 정도였다. 그들 역시 국립남도국악원의 기획이 없었다면 저승혼사굿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공연굿은 대략 각 굿거리를 주관하는 무녀와 보존회의 반주자로 구성된다. 공연굿은 앞서 6월에 공연된 굿만 해도 5시간 길이의 굿, 통상적인 공연의 길이에 맞춘 2시간 길이의 굿, 프로그램의 한 부분을 차지하여 2~30분 이내로 연행되는 굿거리로 이루어졌다. 이는 무대라는 연행 환경에 따른 제약이 크다.</p>



<p class="wp-block-paragraph">굿의 짜임에 있어서도 무대라는 영향력이 발휘된다. 어떤 장소든 굿은 장소에 맞게 굿이 변형되지만, 주최 측의 제안이나 보존회 내부의 안배에 좌우된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은 맥락에 맞지 않는 굿거리를 삽입하게 만들어, 도리어 굿의 진정성을 흐리기도 한다. 또 놀라운 지점은 무당이 이제는 무대의 문법에 적응하였다는 것이다. 동해안별신굿 역시 필자가 처음 보았던 2005년 대변리 별신굿에 비해 2026년의 저승혼사굿은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단어 사용에 있어서도 표준어를 사용하려 애쓰고 있었다. 물론 같은 무당이다. 이 역시 무대 경험이 쌓이면서 직감적으로 무대 문법을 수용하여 다양한 지역의 관객층을 수용하려는 전략처럼 보인다.</p>



<p class="wp-block-paragraph">이런 상황에서 공연굿의 가장 큰 문제는 의례적인 맥락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굿을 주관하는 무당은 변명을 늘어놓기 바쁘다. “원래는 이렇게 하지 않는데 시간이 없어서..” 시간 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맥락도 드러나기 어렵다. 망자천도굿의 넋건지기는 망자의 육신을 잃은 바닷가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나 무대에서 그대로 재연할 수는 없다. 굿을 연행하고 나서 태워야 하는 무구들이 있으나 무대에서는 불을 쓸 수 없다. 그러면 무당은 다시 말한다. “원래 태워야 하는데 여기 태울 수가 없어서&#8230;” 제면거리의 경우 무당이 떡을 구경꾼에게 나누며 복을 빌어야 하지만 극장에서는 취식이 불가능하다. 여러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있음에도 나름 공연굿은 조율을 해가며 연행해왔던 것이 사실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과거 공연굿의 핵심 목적은 전승과 시연 더불어 복원에 있었다. 음악적 요소, 무무, 의례의 순서, 무가 사설 등의 굿의 요소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원형인가 또는 전형인가에 대한 평가가 내재 되었다. 그러나 이미 굿의 연행자가 무대 문법에 적응해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무대를 적극 활용하여 굿의 맥락까지 확실하게 드러내 줄 여러 장치가 필요하다. 공연굿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관점 역시 단순한 시연에서부터 공연예술 작품으로서 또는 의례의 목적이나 주제 메시지에 따른 맥락의 전달로 진화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p>



<p class="wp-block-paragraph">그렇다면 공연굿과 진짜 굿의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첫 번째이다. 진짜 굿은 사제자로서 의례성이 강조되며 이를테면 굿의 목적인 망자 천도를 위한 간절함이나 해원의 의미가 크다. 그러나 공연굿은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하므로 미적 경험이나 감상으로서의 예술성이 부각된다. 따라서 사제자 보다는 예술가의 영역이 더 확장된다. 지금의 상황에서 무당의 정체성은 장소에 따라 무게중심을 다르게 가져가는 것이 오히려 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무대를 사용하더라도 굿의 공간 구현에 대한 맥락은 가져갈 필요가 있다. 안에서 밖으로 나쁜 기운을 몰아내며 정화하는 단계를 공간의 제약으로 인한 핑계로 생략하기보다 맥락을 무대 안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맥락을 검증할만한 굿 연구자의 협업이 도움이 된다.</p>



<p class="wp-block-paragraph">핵심은 굿의 공간적 맥락을 토대로 무대 문법을 통달하여 굿을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전문 연출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2026년 진도의 저승혼사굿의 예로 바닷가에서 해야 하는 넋건지기를 영상으로 미리 찍어 무대 위 굿으로 환원하여 구현하거나, 2019년 대륙시대 함경도 굿에서처럼 망자의 옷을 태우는 것을 대신하여 중정에 망자의 옷보따리를 모아 던지는 퍼포면스로 대체할 수 있다. 혹은 탈을 태우는 것을 AI를 활용하거나 조명과 무대 기술로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다. 굿의 특성을 무대에 적용하여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일반 공연과 달리 객석에 조명을 켜 놓고 굿을 진행하여 무당이 관객의 얼굴을 마주하며 소통한다던지, 마이크 꺼짐, 관객의 무대 난입 같은 돌발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인정(돈)을 무당에게 꽂아 복을 비는 행위는 관객이 어색하지 않도록 연출적으로 길을 터줄 수 있다. 연출은 전체를 컨트롤하며 안정적으로 무대를 진행할뿐더러 굿의 맥락과 문화적 특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p>



<p class="wp-block-paragraph">그러나 대부분의 공연굿은 무당과 악사, 또는 보존회 차원에서 진행된다. 안타깝게도 굿의 의례적 의미가 무대에서 드러나지 않거나 병렬식으로 엮어내는 형태가 자주 발견된다. 관객은 그것이 예외적인지 통상 그런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오해가 생긴다. 무대 문법을 모르는 가짜 연출은 아이디어만 보일 뿐 무대의 효과로 증폭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면 훈련되지 않은 몸짓은 다 들킨다. 당연히 무당은 공연예술에 훈련된 퍼포머가 아니므로 어색한 지점이 있다. 슬프지만 무당을 우습게 만드는 것은 한 끗 차이인 것이다. 그럼 무당을 퍼포머로 훈련시켜야 할까. 진실된 사제자로서의 존중은 그것마저 아우르는 연출로 가능하다. 이것이 무대에 통달한 전문 연출자가 필요한 이유이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2-700x467.jpg" alt="8612" class="wp-image-4212" title="[칼럼] 신과 인간이 마주하는 무대, ‘한 끗 차이’의 연출을 묻다 3"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2-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2-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2-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2-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2-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8612-2048x1365.jpg 2048w" sizes="(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제공: 전통예술공연진흥재단 </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굿의 맥락을 가져간다는 것은 어쩌면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주의가 굿을 기술적, 예능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문화 현상의 의례를 포괄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한다. 관객 역시 굿을 무대 위 신기한 현상이나 기예로 보는 것에서 문화의 범위 및 철학적인 깊은 이해로 더 확장할 수 있다. 또한 관객의 포지션 역시 구경꾼에서 참여자로의 전환을 통해 공동체적 의미를 덜 손상 시킬 수도 있다. 연출의 한 끗 차이가 작품으로서의 가치, 굿의 문화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게 할 것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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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희 하는 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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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구수정]]></dc:creator>
		<pubDate>Fri, 24 Apr 2026 08:41:56 +0000</pubDate>
				<category><![CDATA[칼럼]]></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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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연희(演戲)는 사전적으로 말과 동작을 통해 대중 앞에서 재주를 부린다는 뜻을 가지며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신라&#46;&#46;&#46;</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b9%bc%eb%9f%bc-%ec%97%b0%ed%9d%ac-%ed%95%98%eb%8a%94-%eb%aa%b8/">연희 하는 몸</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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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encoded><![CDATA[
<p class="wp-block-paragraph"></p>



<p class="wp-block-paragraph">연희(演戲)는 사전적으로 말과 동작을 통해 대중 앞에서 재주를 부린다는 뜻을 가지며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신라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에 묘사된 연희는 죽방울이나 골계희, 탈춤, 벽사진경의 의미를 가진 춤, 사자춤이 등장한다. 고려대 팔관회를 통해 연희는 융성했고, 조선시대 사신 접대에 빠지지 않았다. 각 마을에서도 탈춤판이 벌어졌고, 마을 의례에서 농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시작은 재주를 부리는 것에서 탄생했을지 모르지만, 연희는 단순히 ‘재주를 부리는’ 것만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가・무・악・희・극이 미분화된 총체 예술로서의 연희는 서양의 서커스나 연극, 음악극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어 오늘날의 장르 구분으로는 도저히 낄 수 없는 독창적인 우리의 공연예술 형태인 것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이런 연희의 장르적 속성은 독창적이라 할 수 있지만, 지금의 기준에선 분류가 애매하다. 이를 연행하는 연희꾼도 애매함을 가진다. 연희꾼은 노래를 부르지만 음악가는 아니고, 연기를 하지만 연극배우도 아니며, 춤을 추지만 무용의 춤사위와는 차이가 있다. 재주가 많은 연희꾼은 도리어 어느 한 재주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재주를 가지기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를 애매하게 느낀다. 그들의 말을 옮기자면 이것저것 조금씩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반면 음악대학 타악 전공자들은 서서 오금질을 하며 연풍대를 도는 농악 연희꾼들을 동경하고, 음악만 하는 자신들이 가짜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근본은 연희라는 것이다. 이들의 간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음악가도 아닌, 가수도 아닌, 배우도 아닌 무용수도 아닌 이 애매함을 드러내면 연희하는 몸도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이들의 몸 인식을 관찰자로서 추적해보려 한다.</p>



<figure class="wp-block-image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1024" height="683"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84107-1024x683.jpg" alt="〈삼・셋・판〉 공연 사진" class="wp-image-2855" title="연희 하는 몸 4"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84107-1024x683.jpg 1024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84107-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84107-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84107-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84107-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84107-2048x1365.jpg 2048w" sizes="auto, (max-width: 1024px) 100vw, 1024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삼・셋・판〉 공연 사진. 사진 제공: 유희컴퍼니</figcaption></figure>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div class="mzb-heading mzb-heading-82cfe9c7 mzb-heading-layout-1 mzb-heading-layout-1-style-2"><div class="mzb-heading-inner mzb-post-heading"><h3 class="mzb-heading-text undefined" placeholder="This is heading">애매한 몸의 구체화</h3></div></div>



<p class="wp-block-paragraph">사실 연희자의 애매한 몸은 판소리꾼에게서 제일 먼저 포착되었다. 연희에서 판소리는 가장 성공한 장르이자 예술음악으로 안착했었다. 근대 이후 판소리꾼의 무대 공연 메커니즘은 급변하는 사회 만큼이나 격정적이게 분화되어 왔다. 학습 방식은 여전히 스승에게서 구전심수로 전해져 온다. 음악적 기술이나 전통 판소리 사설의 습득은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정도 수련이 되었을 때 소리꾼은 무대에 선다. 대략 극장화된 전통 무대의 소리꾼이 되거나 TV경연이나 축제 등에 어울리는 밴드 형태의 가수, 소리극・창극으로 분류되는 극의 배우로 치환된다.</p>



<p class="wp-block-paragraph">무대 환경 뿐만 아니라 음악 형태도 달라진다. 전통 무대는 그동안 전수된 전통판소리 다섯바탕을 도막소리 또는 완창 형태로 올려진다. 밴드 음악은 전통판소리를 기반으로 재창작된 개인(그룹)의 레파토리를 가진다. 소리극·창극에서는 새로운 대본(사설)에 전통판소리의 음악적 요소를 기반으로 작창되어 부르고, 각 역할이 부여된다. 무대의 성격에 따라 음악의 내용이 바뀌고 있다. 이를 수행하는 몸은 현행 장르에 빗대어 말하자면, 소리꾼, 소리꾼+가수, 소리꾼+배우의 역할을 함께 갖게 된다. 이런 성격은 역할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소리꾼 안에 내재된 요소를 좀 더 전문화 한 것 뿐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현상은 이러한데, 정작 소리꾼의 인식은 어떨까.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필자가 한동안 몸담았던 ‘타루’의 소리꾼들은 스스로 배우라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목격한 예를 들자면 작품 제작 과정에서 연출이 한 소리꾼에게 배역에 맞는 연기를 제안할 때, 소리꾼은 연출이 시범을 보인 대사를 음정으로 인식하고 음의 고저와 길이를 그대로 복사했다. 무려 노래가 아닌 대사임에도! 연출의 디렉션을 연기의 해석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스승의 소리를 받아내듯 똑같이 따라 한 것이다. 물론 그 소리꾼은 평소 배우로서 역할을 잘 소화해냈기 때문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p>



<p class="wp-block-paragraph">또 다른 예로 뮤지컬 배우와 판소리 배우의 차이다. 음향감독의 제보를 옮기자면 이들이 판소리를 할 때는 발성을 단전에서부터 세게 하기 때문에 음량이 굉장히 크지만, 대사를 칠 때는 목을 아끼기 위해 음량을 작게 한다는 것이다. 음향감독으로서는 노래와 말 둘 다 벨런스를 맞추어야 하니 대사는 볼륨을 높이고, 소리는 볼륨을 낮춘다. 대본을 죄다 외우고 있어야 한다는 농담 끝에 나온 이야기였다. 뮤지컬 배우는 노래와 말을 할 때 발성이 훈련되어 일정하기 때문에 음향감독은 그러한 차이를 더 확실히 느꼈을 것이다. 요점은 극을 하고 있지만 소리꾼 스스로 배우로 인식하기보다 음악가라는 정체성이 컸다는 것이다. 그것이 판소리의 학습이나 음악대학 국악과라는 제도 속에서 음악가로 성장해 온 탓도 있겠다.</p>



<p class="wp-block-paragraph">놀랍게도 최근 무대에서 노래와 말의 발성이 일치한 판소리 배우를 종종 확인할 수 있었다. 판소리가 서는 무대가 다양해지고, 더욱 전문성을 요하게 되면서 기존의 음악적, 무대예술적 기준이 강화되는 모습이 관찰된다. 노래에서 음악성을 추구하면서도 배우처럼 연기하기를 기대하고, 대열이나 동작에 있어서 무용처럼 매끄럽기를 바란다. 그래서 판소리꾼은 진작에 자신의 정체성을 판소리에 두면서도 본인의 취향에 맞게 음악가와 배우의 사이에서 선택하거나 무대에 맞게 몸을 요리조리 맞춰내고 있다.</p>



<p class="wp-block-paragraph">판소리가 보다 앞서 몸을 구체화했다면 또 다른 연희하는 몸은 어떠한가. 현재 우리가 목격 가능한 연희는 탈놀이, 덜미(인형극), 농악, 굿, 굿놀이, 줄타기 등이 있다. 이들은 악기를 연주하면서도 대열을 만들거나, 춤을 추면서도 대사를 치거나, 인형을 다루며 움직임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공수를 하고, 직접 줄을 타면서도 재담을 친다. 이들의 움직임은 무용처럼 정형화되지 않고 날것에 가깝다. 이들의 노래는 고운 발성보다 신이나 대중을 향한 말에 가깝고, 이들의 연주는 개인의 기량을 돋보이기보다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치기 때문에 고수와 하수가 어우러진다. 이를 종합해보면 서양 기준 18세기 이후 순수예술의 입장에서 볼 때 질감은 거칠고 애매하고 덜 다듬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연희는 모든 모양의 몸을 수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결국 연희는 몸으로 말하는 예술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div class="mzb-heading mzb-heading-eebab59c mzb-heading-layout-1 mzb-heading-layout-1-style-2"><div class="mzb-heading-inner mzb-post-heading"><h3 class="mzb-heading-text undefined" placeholder="This is heading">판덕 있다 하는 것</h3></div></div>



<p class="wp-block-paragraph">그 중에서도 무대에서 눈에 띄는 연희꾼이 있다. 왜 다 같이 악기를 치면서도 저 사람은 다를까? 탈을 써도 표정이 보일까? 연희가 마당에서 무대로 환경이 전환된 후 연희꾼의 표현력도 변화가 필요했다. 오랫동안 연희하는 몸에 대해 궁금해 왔던 필자가 유희컴퍼니의 〈삼・셋・판〉 제작 과정을 함께 하면서 소위 무대를 씹어먹는 이들을 관찰해 보면 특징이 있었다.</p>



<figure class="mzb-image mzb-image-e538e34f"><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class="wp-image-2858 hover-effect-static filter-none mask mask-none"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66103-scaled.jpg" height="2560" width="1707" alt="1776159366103 scaled" title="연희 하는 몸 5"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66103-scaled.jpg 1707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66103-200x300.jpg 2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66103-333x500.jpg 333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66103-150x225.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66103-768x115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66103-1024x1536.jpg 1024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4/1776159366103-1365x2048.jpg 1365w" sizes="auto, (max-width: 1707px) 100vw, 1707px" /><figcaption>〈삼・셋・판〉소고춤을 추는 성유경. 사진 제공: 유희컴퍼니</figcaption></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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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첫번째, 시선 처리가 명확하다. 그의 시선은 정확하게 관객을 향해 있다. 자기 동작 하기에 바쁘지 않다. 이 춤사위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느껴지고, 관객의 반응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p>



<p class="wp-block-paragraph">두 번째, 등에도 기세가 있다. 관객을 등지고 하는 춤사위를 출 때에도 등에 눈이 있나 싶을 정도로 기운을 전달한다. 이는 첫번째 특징과 일맥상통하는데 정확히 관객을 타깃으로 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아주 탁월한 발신자라는 것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세 번째, 무대 위 연습량이 많다. 연습실에서 만든 작품을 무대에 처음 올리기 위해서 연행자들은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 조명, 방향, 동선을 완전히 익히려면 그 무대와 익숙해져야 한다. 작품에서 자신의 몫을 잘 해내는 이들은 무대에 익숙해지기 위해 쉬는 시간에도 제일 오래 무대를 밟고 있었다.</p>



<p class="wp-block-paragraph">네 번째, 집요하게 시도해본다. 리허설과 공연 기간을 포함해서 자신의 연기를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정확도를 높인다. 이를테면 음악에 꼭 맞는 동작이라던지, 자기 차례에 특별한 제스쳐라던지. 여러번 시도 한 것 중 얻어 걸린 것이 있으면 다시 반복해서 자기 실력으로 만든다. 공동체를 흐트리지 않으면서 자기 몫을 정확히 따서 챙기는 연희꾼, 관객 입장에서 눈에 띄는 연희꾼을 옛말로 “판덕있다”고 했다.</p>



<p class="wp-block-paragraph">이런 특징은 농악·탈춤·인형극·굿 등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무대에서 진화한 판소리꾼과 같이 농악·탈춤·인형극 등의 분야에서도 점점 기존의 연희꾼 기준에서 더욱 강화되는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이것이 근대식 무대라는 공간에 의한 변화라고도 할 수 있겠고, 더불어 전 장르를 포함한 공연예술의 속성을 쑥쑥 빨아들이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연희하는 몸의 ‘애매함’이란 기존의 장르적 특성에 부합하지 않는 특수성을 내재하면서도 무대의 문법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몸, 그것을 단순히 “끼가 있다”라고 표현하기엔 아깝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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