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 하는 몸

연희(演戲)는 사전적으로 말과 동작을 통해 대중 앞에서 재주를 부린다는 뜻을 가지며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신라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에 묘사된 연희는 죽방울이나 골계희, 탈춤, 벽사진경의 의미를 가진 춤, 사자춤이 등장한다. 고려대 팔관회를 통해 연희는 융성했고, 조선시대 사신 접대에 빠지지 않았다. 각 마을에서도 탈춤판이 벌어졌고, 마을 의례에서 농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시작은 재주를 부리는 것에서 탄생했을지 모르지만, 연희는 단순히 ‘재주를 부리는’ 것만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가・무・악・희・극이 미분화된 총체 예술로서의 연희는 서양의 서커스나 연극, 음악극과는 또 다른 결을 가지고 있어 오늘날의 장르 구분으로는 도저히 낄 수 없는 독창적인 우리의 공연예술 형태인 것이다.

이런 연희의 장르적 속성은 독창적이라 할 수 있지만, 지금의 기준에선 분류가 애매하다. 이를 연행하는 연희꾼도 애매함을 가진다. 연희꾼은 노래를 부르지만 음악가는 아니고, 연기를 하지만 연극배우도 아니며, 춤을 추지만 무용의 춤사위와는 차이가 있다. 재주가 많은 연희꾼은 도리어 어느 한 재주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다양한 재주를 가지기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를 애매하게 느낀다. 그들의 말을 옮기자면 이것저것 조금씩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음악대학 타악 전공자들은 서서 오금질을 하며 연풍대를 도는 농악 연희꾼들을 동경하고, 음악만 하는 자신들이 가짜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근본은 연희라는 것이다. 이들의 간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음악가도 아닌, 가수도 아닌, 배우도 아닌 무용수도 아닌 이 애매함을 드러내면 연희하는 몸도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이들의 몸 인식을 관찰자로서 추적해보려 한다.

1776159384107 scaled
f23007e1 d65c 4665 80c0 b6295c55efd6
1776159390743 1 scaled
©️ 유희컴퍼니 제공 <삼・셋・판>

애매한 몸의 구체화

사실 연희자의 애매한 몸은 판소리꾼에게서 제일 먼저 포착되었다. 연희에서 판소리는 가장 성공한 장르이자 예술음악으로 안착했었다. 근대 이후 판소리꾼의 무대 공연 메커니즘은 급변하는 사회 만큼이나 격정적이게 분화되어 왔다. 학습 방식은 여전히 스승에게서 구전심수로 전해져 온다. 음악적 기술이나 전통 판소리 사설의 습득은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정도 수련이 되었을 때 소리꾼은 무대에 선다. 대략 극장화된 전통 무대의 소리꾼이 되거나 TV경연이나 축제 등에 어울리는 밴드 형태의 가수, 소리극・창극으로 분류되는 극의 배우로 치환된다.

무대 환경 뿐만 아니라 음악 형태도 달라진다. 전통 무대는 그동안 전수된 전통판소리 다섯바탕을 도막소리 또는 완창 형태로 올려진다. 밴드 음악은 전통판소리를 기반으로 재창작된 개인(그룹)의 레파토리를 가진다. 소리극·창극에서는 새로운 대본(사설)에 전통판소리의 음악적 요소를 기반으로 작창되어 부르고, 각 역할이 부여된다. 무대의 성격에 따라 음악의 내용이 바뀌고 있다. 이를 수행하는 몸은 현행 장르에 빗대어 말하자면, 소리꾼, 소리꾼+가수, 소리꾼+배우의 역할을 함께 갖게 된다. 이런 성격은 역할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소리꾼 안에 내재된 요소를 좀 더 전문화 한 것 뿐이다.

현상은 이러한데, 정작 소리꾼의 인식은 어떨까.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필자가 한동안 몸담았던 ‘타루’의 소리꾼들은 스스로 배우라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목격한 예를 들자면 작품 제작 과정에서 연출이 한 소리꾼에게 배역에 맞는 연기를 제안할 때, 소리꾼은 연출이 시범을 보인 대사를 음정으로 인식하고 음의 고저와 길이를 그대로 복사했다. 무려 노래가 아닌 대사임에도! 연출의 디렉션을 연기의 해석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스승의 소리를 받아내듯 똑같이 따라 한 것이다. 물론 그 소리꾼은 평소 배우로서 역할을 잘 소화해냈기 때문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또 다른 예로 뮤지컬 배우와 판소리 배우의 차이다. 음향감독의 제보를 옮기자면 이들이 판소리를 할 때는 발성을 단전에서부터 세게 하기 때문에 음량이 굉장히 크지만, 대사를 칠 때는 목을 아끼기 위해 음량을 작게 한다는 것이다. 음향감독으로서는 노래와 말 둘 다 벨런스를 맞추어야 하니 대사는 볼륨을 높이고, 소리는 볼륨을 낮춘다. 대본을 죄다 외우고 있어야 한다는 농담 끝에 나온 이야기였다. 뮤지컬 배우는 노래와 말을 할 때 발성이 훈련되어 일정하기 때문에 음향감독은 그러한 차이를 더 확실히 느꼈을 것이다. 요점은 극을 하고 있지만 소리꾼 스스로 배우로 인식하기보다 음악가라는 정체성이 컸다는 것이다. 그것이 판소리의 학습이나 음악대학 국악과라는 제도 속에서 음악가로 성장해 온 탓도 있겠다.

놀랍게도 최근 무대에서 노래와 말의 발성이 일치한 판소리 배우를 종종 확인할 수 있었다. 판소리가 서는 무대가 다양해지고, 더욱 전문성을 요하게 되면서 기존의 음악적, 무대예술적 기준이 강화되는 모습이 관찰된다. 노래에서 음악성을 추구하면서도 배우처럼 연기하기를 기대하고, 대열이나 동작에 있어서 무용처럼 매끄럽기를 바란다. 그래서 판소리꾼은 진작에 자신의 정체성을 판소리에 두면서도 본인의 취향에 맞게 음악가와 배우의 사이에서 선택하거나 무대에 맞게 몸을 요리조리 맞춰내고 있다.

판소리가 보다 앞서 몸을 구체화했다면 또 다른 연희하는 몸은 어떠한가. 현재 우리가 목격 가능한 연희는 탈놀이, 덜미(인형극), 농악, 굿, 굿놀이, 줄타기 등이 있다. 이들은 악기를 연주하면서도 대열을 만들거나, 춤을 추면서도 대사를 치거나, 인형을 다루며 움직임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면서 공수를 하고, 직접 줄을 타면서도 재담을 친다. 이들의 움직임은 무용처럼 정형화되지 않고 날것에 가깝다. 이들의 노래는 고운 발성보다 신이나 대중을 향한 말에 가깝고, 이들의 연주는 개인의 기량을 돋보이기보다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치기 때문에 고수와 하수가 어우러진다. 이를 종합해보면 서양 기준 18세기 이후 순수예술의 입장에서 볼 때 질감은 거칠고 애매하고 덜 다듬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연희는 모든 모양의 몸을 수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결국 연희는 몸으로 말하는 예술이다.

판덕 있다 하는 것

그 중에서도 무대에서 눈에 띄는 연희꾼이 있다. 왜 다 같이 악기를 치면서도 저 사람은 다를까? 탈을 써도 표정이 보일까? 연희가 마당에서 무대로 환경이 전환된 후 연희꾼의 표현력도 변화가 필요했다. 오랫동안 연희하는 몸에 대해 궁금해 왔던 필자가 유희컴퍼니의 〈삼・셋・판〉 제작 과정을 함께 하면서 소위 무대를 씹어먹는 이들을 관찰해 보면 특징이 있었다.

1776159366103 1 scaled
©️ 유희컴퍼니 제공 <삼・셋・판> 소고춤을 추는 성유경

첫번째, 시선 처리가 명확하다. 그의 시선은 정확하게 관객을 향해 있다. 자기 동작 하기에 바쁘지 않다. 이 춤사위를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느껴지고, 관객의 반응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두 번째, 등에도 기세가 있다. 관객을 등지고 하는 춤사위를 출 때에도 등에 눈이 있나 싶을 정도로 기운을 전달한다. 이는 첫번째 특징과 일맥상통하는데 정확히 관객을 타깃으로 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아주 탁월한 발신자라는 것이다.

세 번째, 무대 위 연습량이 많다. 연습실에서 만든 작품을 무대에 처음 올리기 위해서 연행자들은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 조명, 방향, 동선을 완전히 익히려면 그 무대와 익숙해져야 한다. 작품에서 자신의 몫을 잘 해내는 이들은 무대에 익숙해지기 위해 쉬는 시간에도 제일 오래 무대를 밟고 있었다.

네 번째, 집요하게 시도해본다. 리허설과 공연 기간을 포함해서 자신의 연기를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정확도를 높인다. 이를테면 음악에 꼭 맞는 동작이라던지, 자기 차례에 특별한 제스쳐라던지. 여러번 시도 한 것 중 얻어 걸린 것이 있으면 다시 반복해서 자기 실력으로 만든다. 공동체를 흐트리지 않으면서 자기 몫을 정확히 따서 챙기는 연희꾼, 관객 입장에서 눈에 띄는 연희꾼을 옛말로 “판덕있다”고 했다.

1776159370891 scaled
©️ 유희컴퍼니 제공 <삼・셋・판>

이런 특징은 농악·탈춤·인형극·굿 등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무대에서 진화한 판소리꾼과 같이 농악·탈춤·인형극 등의 분야에서도 점점 기존의 연희꾼 기준에서 더욱 강화되는 과정을 거치는 중이다. 이것이 근대식 무대라는 공간에 의한 변화라고도 할 수 있겠고, 더불어 전 장르를 포함한 공연예술의 속성을 쑥쑥 빨아들이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연희하는 몸의 ‘애매함’이란 기존의 장르적 특성에 부합하지 않는 특수성을 내재하면서도 무대의 문법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몸, 그것을 단순히 “끼가 있다”라고 표현하기엔 아깝다.

글/ 공연예술평론가 구수정

You may also l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