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이라는 울타리, 뒤흔들린 위계의 역설 – 김관지 〈킬링 하이라키〉

세종문화회관에서 큰 판을 벌였다. 싱크넥스트(Sync next 26)는 서울에서 예술의 가장 끝점을 가진 컨템포러리 플랫폼이다. 장르의 경계를 두지 않고 모든 형태의 예술을 아우른다는 싱크넥스트는 블랙박스 시어터인 세종S시어터에서 7월에서 9월까지 10팀의 예술가를 만난다. 그 중 김관지의 <킬링 하이라키>는 7월24일부터 한번의 워크샵을 포함하여 4일간 열린다. 즉흥성이 강한 공연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에서 관람했느냐에 따라서도 의견이 갈릴 것 같다. 필자는 마지막 27일 공연을 자유석으로 관람했다. <킬링 하이라키> 또는 안무가 김관지에 관한 기사를 훑어보더라도 즉흥성, 파격, 경계를 뒤흔드는 무용이라는 타이틀이 붙는다. 그 흥미로운 판단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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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구수정

<킬링 하이라키>는 위계(Hierarchy)를 겨냥해 질서를 전복하는 경험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무대 위에서 퍼모머라는 카테고리 안에 무용수와 연주자의 경계를 흐리고, 또 퍼포머와 관객이 무대 입장을 함께 하면서 경계를 흐리는 전략을 보여준다. 퍼포머를 따라 무대 경계를 빙 돌아 바라본 장면은 조명과 레이저로 다른 경계를 만들거나 무대 안에서 지정석에 앉은 관객들이 배경이 된다. 시선을 바꾸는 것 만으로도 묘한 쾌감을 준다.

관객석을 뒤집어 시선을 흐트르다

도입 무대에서는 각 스팟마다 다른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다. 2층 상수에 매달려 있는 무용수나 바로 옆에서 굉음을 내며 나오는 포그에 시야가 완전히 가려버리고,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는 등 일반 무대에서 겪을 수 없는 다양한 방식의 자극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집중에 대한 불편함마저 설계한 것일까. 보는 각도에 따라 가려지거나 부각되면서 관객은 시야에 대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일방적으로 하나의 퍼포먼스만 집중하게 하는 근대식 극장을 해체시키는 것에서는 성공적이었다.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 없었으니.

우연히 바로 옆에 앉은 농인 관객과 수어 안내자의 소통 방식에 눈길이 간다. 기사에 따르면 농인 관객과 수어 통역자의 합류는 작품의 일부로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기존의 배리어프리 공연의 어설픈 착함보다 이렇게 극한의 예술 작품의 선택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면에서 놀랍다.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시끄러운 음악 안에서 내게 수어 안내자가 자신 때문에 시야가 가릴까봐 괜찮냐는 말을 수어로 하면서 서로 웃었다. 수어는 몰라도 그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 기존의 언어적 소통 방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각자의 퍼포먼스를 지속시키면서도 어떤 장면에서는 관객의 주의를 모두 가져온다. 레이저로 쏘아진 경계 사이로 은박지를 이용해 무용수가 빛을 산란시키거나 손전등으로 중간중간 벌어지는 즉흥컨택을 비추며 집중시키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거울의 위치를 바꾸며 손전등 빛의 방향을 반사시켜 의도되지 않은 모양새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마치 여러 방향으로 부는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모빌과도 같았다. 퍼포머의 즉흥이 손전등의 조명마저도 정해지지 않은 방향성으로 인해 더욱 돋보인 것 같다.


무대 위 대 혼돈 속에서도 무용수들은 훈련된 감각으로 공간을 채우며 안전하게 움직인다. 서로 부딪치지 않고, 겹치지 않고, 빈 곳도 바로 채우면서. 퍼포머가 즉흥적으로 행하는 방식 역시 지금까지의 통제에 의한 반항에서 나온 것이다. 내던진다. 음악도 몸도 거칠다고 하기엔 정돈이 되지 않은 표현들이다. 쥐락펴락 하는 볼륨감은 결국 전체 그림을 보는 안무자의 몫이기도 하다. 종종 현타 오는 퍼포머의 표정을 무대 뒤편에서 엿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라 할 수 있다.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무대 설계 자체에서 이러한 요소까지 포함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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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구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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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구수정

한편으로 무대를 둘러앉은 관객들이 다치지 않도록 관객은 나름 적극적으로 퍼포머의 길을 터주거나 은박지를 흔들며 공연에 협조한다. 그러나 퍼포머가 관객을 없는 사람처럼 의식하고 시선을 피하며 일상적이지 않은 템포로 걷는 순간 이미 관객과 퍼포머의 경계가 그어졌다. 즉흥성이란 결국 안전함 안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안전하지 않으면 단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퍼포머와 관객의 경계를 없애겠다고 했지만 관객이 무대로 뛰어들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안전함이 담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라포(Rapport-상호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무대 참여는 어렵다. 관객에게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인식되면서 원래 인식되는 무대와 관객의 경계를 강화시킨 것이다.

국악과 현대 예술의 만남이 빈번한 이유

<킬링 하이라키>는 국악 베이스의 악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정가, 판소리 등의 성악부터 대금, 아쟁 등의 연주자가 연주만 맡은 것이 아니라 무용수와 어울려 무대를 종횡무진한다. 또 시조나 남도 민요인 흥타령, 강강술래가 다발적으로 이루어 진다. 유독 한국에서는 클래식과 결합한 즉흥 무용공연이나 다원예술 보다는 국악(기)과 다원예술의 관계가 더 자주 발견된다. 각자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킬링 하이라키>에서 관찰되는 요소는 질감에 있다. 아주 다듬어지지는 않은, 바꾸어 말하면 자연에 가까운 소리의 질감, 그 질감이 컨템포러리의 실험성과 맞닿아 있다. 대략 컨템포러리는 매끈하게 정형화된 예술을 재발견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므로 휘젓거나 뒤집거나 깨트리는 과정에서 거칠어진다. 국악은 폼은 있으나 유연하다. 질감이 얼마간 비슷하니 이질적인 요소를 붙여 놓아도 제법 이물감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국악의 즉흥성이 난장판이나 대환장파티는 아니라는 것이다. <킬링 하이라키>는 극장을 놀이와 제의적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굿의 무아(無我)는 정교하게 계획된 거리의 단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중심에는 관객의 마음을 어떻게 가져오느냐에 있다. 굿의 신성성, 제의성, 엄중함이 안전히 담보되었을 때 나를 내려놓는다. 관객을 살펴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는 거리를 늘이거나 다른 무(巫)적 장치를 통해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세운다. 앞서 라포와도 연결되는 이야기다. 준비가 되어 그 단계를 넘었을 때 신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 되기 시작한다. 아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뜬금없는 강강술래는 의도는 알겠으나 실패다. 국악의 요소를 가져오는 것은 손쉽지만 맥락이 잘린 상황에서 설계를 잘 하지 않으면 그저 차용한다고 그 효과를 보는 것은 아니다.

한편 현대예술에서 아무리 음악이 해체되고 가장 작은 단위의 국악만 남았다 하더라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음의 공력이다. 음의 공력은 악기의 음색을 이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한 사람이 일생을 갈아 만든 소리의 힘이자 기(氣)다. 소음 속에서도 음의 공력은 생각보다 큰 반향을 주는데 이를 실현하는 보컬이나 연주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공력이 무너지면 새로운 시도는 결국 상처만 남고 제 이름만 깎아내리고 만다. 연출적으로 보호가 되지 않는 즉흥연주에서는 더욱 그렇다. 새로운 시도가 시도로 끝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자유 속의 관음, 신의 시선인가 인간의 시선인가

탑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퍼포머들이 직접 무용수를 비추는 손전등은 관음적인 인간의 태도를 연상케 했다. 마치 시선을 빛으로 전환한 것처럼 말이다. 특히 관객들의 개인적인 촬영을 허용했다는 것 자체가 자유를 줌으로서 인간의 관음성을 그대로 시험한 것이 아닌가. 마지막 여성-남성 무용수의 컨택즉흥은 아름다운 장면이나 편안하지 못했다. 상의를 탈의한 여성 무용수는 무용으로 다져진 고결한 등근육의 움직임을 숨죽이고 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한편으로 그 장면을 촬영하는 남성 관객 때문에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나의 성별로부터 오는 것인가. 아니면 과도하게 오픈된 자유 때문에 오는 것인가. 불편은 의도된 것인가. 춤을 추는 무용수는 그 무대가 안전하다고 여겨졌을지 궁금하다. 가장 연약함을 내세워 이룬 위계에 대한 항의라면 그 위는 어디인가. 시스템인가, 남성인가, 신인가. 아무래도 신은 아닌 것 같다.

컨택즉흥 끝이 예상되는 결말로 끝을 맺었다는게 참 허탈하다. 결국 위계에 굴복한 것만 같아 자존심이 상한다. 남성 무용수가 옷을 덮어주기 전에 저 옷을 찢어버리는 상상을 하며 아쉬운 결말을 제멋대로 내본다. 몸의 대상화에 대한 경계를 아슬하게 넘으면서 관객의 불편함을 의도한 것이라면 할 말 없지만 결국 불편함에 가려 메시지를 남기지 못한게 아닌지 아쉽다.

우리가 새롭다, 파격적이다 할만한 것들은 이미 세계 각종 페스티발 등에서 시도되어 왔다. 특히 인간의 신체를 탐색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작품들은 공연장이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던지고 새로운 문을 연다. 새로운 기법, 새로운 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도에 얼마나 잘 부합하고, 누군가를 설득했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킬링 하이라키>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주고 그로부터 발생 되는 감정을 동시다발적으로 터트린다. 그러나 과연 관객과 퍼포머 모두 안전하게 정서를 처리할 수 있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하겠다.

결과적으로 <킬링 하이라키>는 관객 참여보다는 관객의 시선을 전환시키되 관객과 퍼포머의 경계를 오히려 확실하게 그어버린다. 필자는 시선을 전환시킨 것 자체가 이 공연에서 아주 특별하다고 느껴졌다. 욕조 씬처럼 무대에서 샤워를 하거나 여성 퍼포머들의 컨택 연기를 아주 근접한 상태에 관음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것만으로도 독특했다. 물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그것은 자유석에서 관람했을 때의 일이고 지정석의 관객은 또 다른 감흥이 있었을 것 같다. <킬링 하이라키>의 전략은 완전히 꿰지도 않으면서 뜻밖의 곳에서 신기한 감흥을 준다. 좋음과 싫음이 극적으로 치달으면서 느슨한 짜임이 관객의 내면을 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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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구수정

세상을 뒤집는 것 자체가 위험성과 불안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예술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심리적 위험성을 다양하게 실험해 왔다. 예술의 최전방은 늘 혼재되어 있다. 안전하다는 것이 과감한 것과 반대말은 아니다. 안전함과 불안전함, 정돈됨과 거친 결의 균형을 잘 유지하면서, 내던진 뒤 반응을 살피기보다 무엇이든 터트려도 과감해 질 수 있는 심리적 울타리가 되어줄 필요가 있다.

글/공연예술평론가 구수정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학박사(음악학)
제4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평론가상 대상 수상

소외되고 외로운 것에 마음이 가고,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낸다. 에세이 『가끔은 혼자이고 싶은 너에게』, 『마음을 듣고 위로를 연주합니다』를 썼다. 제4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했다. 음악치료사, 교육가, 연구자 등 음악 안에서 인생을 자유롭게 변주하며 산다.


김관지 〈킬링 하이라키〉

Sync Next 26
2026.07.24.–07.27. 세종S씨어터
(재)세종문화회관 / 안무 김관지 / 출연 구민지, 권민창, 김강민, 김명건, 김재진, 김관지, 마도현, 송지우, 유영은, 이숙영, 이호행, 전채연, 정명훈, 정필균, 조아라, 표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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