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리지>·<홍련>: 소란한 여자들, 폭력의 고리를 끊어내다

폭력은 순환한다. 폭력은 물리적·정신적·언어적·성(性)적인 영역까지 손을 뻗으며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해 왔다. 악행은 하나의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말없이 물리적·성적으로만 조용히 행해지는 폭력은 없다. 악은 피해자에게 닿는 순간 자기혐오로 변하며, 자신을 학대하게 만든다.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에서 행해지는 폭행은 국경과 시대의 경계를 넘어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까마득한 옛날 이름도 모르는 낯선 나라에서 행해졌을 가정 폭력은, 오늘날 대한민국 여느 집에서 벌어질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정 폭력 피해자는 대부분 아이·여성이다.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권력 행사와 물리적 제압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약자가 강자의 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행위는 저항이고 복수다.

불공평하게도 폭력과 복수의 양은 비례하지 않는다. 폭력은 현실에 뚜렷하게 존재하지만, 복수는 피해자의 마음속에서 겁먹은 채 흐릿하게 떠다닐 뿐이다. 그렇기에 복수극은 끊임없이 재생산됐다. 복수를 실행할 힘과 용기는 이야기 속에서나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 <리지>와 <홍련>은 친부와 계모에게 직간접적으로 폭력을 당한 둘째 딸이 주인공이다. <리지>는 1892년 8월 4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폴 리버에서 발생한 미제사건 ‘리지 보든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라이센스 뮤지컬이다. <홍련>은 1656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일어난 배장화·배홍련 자매 자살 사건 동생 ‘홍련’을 바리데기 설화의 ‘바리’가 재판한다는 설정의 창작 뮤지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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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쇼노트

두 작품 모두 주인공 리지와 홍련이 폭력의 피해자인 것과 동시에 가해자란 점, 부모에게 복수를 시도했단 점, 친부에게 무기(도끼·장검)로 위해를 가했다는 점, 주인공의 언니(엠마·장화)가 실질적·정서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란 점, 재판 장면이 극 전개에 결정적 열쇠가 된다는 점, 현실에선 공포에 입이 막혔던 주인공이 가해자인 친부의 죽음을 계기로 비로소 목소리를 내게 된다는 공통점들이 존재한다.

이에 <리지>는 리지가 친부를 살해하는 순간의 절규를 헤비메탈 록 넘버 ‘Somebody Will Do Something(누군가 뭔 짓을 할 거야)’로 탄생시켰다. <홍련>도 ‘괴물’, ‘네 얘기의 결말’ 등 강렬한 록 넘버들을 초·중반부에 배치했다. 또한 홍련의 넋을 위로하는 바리의 외침을 국악풍 ‘씻김’ 넘버로 만들어 소극장 창작 뮤지컬에서 손꼽히는 독보적인 장면을 구축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숨죽였지만, 각성 후엔 분노와 광기를 토해내는 리지와 홍련의 소란한 외침은 단순한 음악적 카타르시스 이상이다.

하얀 손을 붉은 피로 물들이다 – 뮤지컬 <리지>

오랫동안 성적인 학대를 받은 리지는 친부와 계모를 도끼로 살해한다. 언니 엠마는 피 묻은 돈을 건네며 하녀 브리짓을 매수하고, 증인이자 공모자인 브리짓은 눈을 감는다. 보든 가 울타리 안에 함께 살았던 리지·엠마·브리짓은 같은 고통을 겪었기에 손을 잡는 게 쉬웠다. 하지만 리지의 친구이자 연인, 이웃 앨리스는 달랐다. 앨리스는 리지의 삶을 함께 아파했지만, 보든 가 바깥에 살았기에 미스터 보든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살인엔 동의할 수 없었던 앨리스는 끝까지 갈등한다. 법정에서 리지와의 관계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그제야 코르셋을 벗는 앨리스는 리지의 편에 서고, 네 여성들은 자유를 찾는다.

실화의 보든 부부와 딸들은 재산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리지에게 도끼를 들게 한 결정적 원인은 성적 학대, 통제, 살인이었다. 리지와 앨리스 관계를 눈치챈 친부는 리지가 기르던 하얀 새들을 도끼로 쳐 살해했고, 리지는 같은 방식으로 보든 부부에게 복수한다. 이처럼 뮤지컬은 리지의 잔혹한 살인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장치를 추가해, 그를 가련한 피해자이자 복수의 신으로 만들며 하드 록 뮤지컬에 맞는 극단적 캐릭터성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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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쇼노트

2009년 미국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리지> 국내 초연은 2020년이었다. 코로나19가 공연계를 잠식해 가던 2020년, <리지>의 상륙은 파격이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서 꾸준히 사랑받은 록 뮤지컬 <헤드윅> 제작사 쇼노트가 내놓는 록 뮤지컬 신작이기에 <리지>는 공개와 동시에 큰 관심을 받았다. <리지> 초연은 <헤드윅>에서 헤드윅 남편 이츠학을 연기했던 이영미·유리아·제이민·홍금비를 캐스팅해 이른바 ‘이츠학 페어’를 만들며 화제를 모았다. 헤드윅의 그림자였던 이츠학들이 여성 서사 뮤지컬 주인공으로 나선 것이다.

헤비메탈 록·가스펠·발라드·펑크 록 등 다양한 장르의 넘버들, 존속살인·동성애 등 금기를 건드리는 소재와 감정선, 친부 살해 장면에서 온몸이 새빨갛게 피 범벅되는 리지의 충격적인 비주얼, 피 묻은 도끼·새의 깃털과 새장·금빛 서양 배 등 감각적인 오브제, 19세기 드레스를 벗어 던지고 21세기 록스타의 옷으로 갈아입으며 동시대 감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까지.

코로나19로 인해 함성조차 금지됐던 2020년이었지만 <리지>는 객석을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여성 서사 작품 수가 현재보다 훨씬 적었던 2020년이었기에, 작품은 여성의 이야기를 갈구하던 이들의 갈증을 해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뮤지컬 <리지>는 2020년의 호평과 흥행을 바탕으로, 2022년과 2024년엔 더 큰 극장으로 무대를 옮겼다. 가장 최근 시즌인 삼연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2024년 9월 14일부터 12월 1일까지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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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의 살인은 복수가 아닌 생존이었다. 정신까지 갉아먹던 친부가 유일한 숨구멍인 하얀 새들을 핏빛으로 물들였을 때, 리지의 하얀 마음 또한 증오와 분노로 붉어졌다. 새들은 죽었고, 보든 가 울타리 밖 이웃·친구·연인 앨리스마저 위험해질 뻔했다. 자신은 지키지 못해 무력감에 사로잡힐지라도, 소중한 존재마저 위협받는다면 행동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면 관객은 엠마, 브리짓, 앨리스처럼 리지 편에 설 수밖에 없다. 1892년 폴 리버에 살았던 리지만이 아닌 오늘날까지도 모든 여성은 늘 위험에 노출돼 있으며, 통제와 억압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성폭력이나 성추행뿐만이 아닌, 원치 않는 성적인 프레임에 편입돼 관찰당하는 것도 폭력이다. 관음과 평가의 시선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여성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리지처럼 도끼를 들진 못하더라도, 고통에서 해방된 그의 후련한 모습을 바라봐주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붉게 물든 복수심을 하얀 용서로 안아주다 – 뮤지컬 <홍련>

리지는 복수했고, ‘자매’들과 연대해 무죄를 선고받으며 온전한 생을 되찾았다. 반면 홍련의 재판은 사후세계에서 이뤄진다. 몸 크기만 한 장검으로 아버지 배무룡을 살해하고, 동생 장쇠의 팔과 다리를 잘랐으니 자신은 유죄라 주장하는 홍련은 가정 폭력 피해자다. 여리고 겁 많던 홍련은 쌍둥이 언니 장화가 친부와 계모에게 당하는 폭력에서 홀로 도망친다. 폭력에 방치되다 죽은 장화는 외간 남자와 사통하다 유산했단 오명을 쓰고, 홍련은 언니 대신 정혼자와 결혼할 위기에 처한다. 장화 죽음의 진실을 1년 후에야 알게 된 홍련은 자결한다.

죄책감과 한에 발목이 묶여 저승을 맴도는 홍련은, 자신이 친부를 살해하고 남동생을 해쳤단 망상에 사로잡힌다. 아무것도 못 하고 떨기만 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홍련은, 상상 속에서라도 친부를 찢어 죽이며 장화에게 사죄한 것이다.

오래전, 딸이라 버려진 바리는 천벌을 받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저승의 약수를 바친 후 아버지를 떠난다. 저승에 남아 영혼들을 돌보는 천도정의 신이 된 바리는 홍련을 위해 13만 9998번의 재판을 연다. 재판 형식을 빌린 기억을 되찾는 과정,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한 편의 연극은 영겁에 가까운 세월 동안 반복됐다. 진정 홍련을 위한다면 소멸의 길을 도우라는 강림은 왜 저 망자를 그토록 놓지 못하냐 묻는다. 바리는 답한다. 나 같아서. 천도정에서의 반복되는 재판들은 홍련뿐 아니라 바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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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초연, 2026년 재연 모두 파란을 일으키며 대성공한 뮤지컬 <홍련>은 2022년 CJ문화재단 ‘스테이지업’, 2023년 ‘K-뮤지컬 국제마켓’ 리딩 쇼케이스를 거쳐 개발된 작품이다. 전 회차 전석 매진을 기록한 <홍련> 재연은 2026년 2월 28일부터 5월 17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됐다.

록 넘버 ‘네 얘기의 결말’에서 홍련과 바리는 대립한다. 홍련은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고 그를 용서한 게 어떻게 복수가 되냐 묻고, 바리는 복수심 끝엔 도대체 뭐가 남는 거냐며 반박한다. 이처럼 <홍련>은 상업 뮤지컬이 갖춰야 할 재미와 음악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복수와 증오, 용서와 화합에 대한 관점들도 제시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2010년대 후반부터 상업 뮤지컬 시장에 자리 잡기 시작한 여성 서사 뮤지컬은 2020년 <리지> 이후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다. <홍련>은 극장 안에서 관객을 울고 웃게 만드는 작품성과 오락성, 극장을 나선 후에도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홍련들’을 잊지 않게 만드는 무대극의 덕목까지 갖추며 완성형 여성 서사 뮤지컬로 이름을 알렸다.

리지의 재판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수십 년간 끔찍한 고통을 준 친부를 심판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홍련의 재판은 그 반대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동생을 해쳤기 때문에 자신은 죄인이란 논리를 펼치는 홍련은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싶다. 그의 주장처럼 집안 남자들에게 상해를 입혔기 때문이 아니다. 생전엔 언니 장화의 고통을 외면한 끔찍한 자신을 죽어서라도 심판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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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새빨간 오랏줄을 손목에 묶은 홍련은 붉은 마이크를 손에 쥐고, 붉은 끈이 묶인 컨버스 운동화를 신는다. 컨버스 운동화는 오늘날에도 홍련처럼 가정 폭력에 고통받는 소녀들이 아직도 많다는 동시대적 상징이다.

반면 천도정의 신이자 재판장 역할인 바리의 의상은 새하얗다. 무대 중앙에 자리한 둥근 원은 붉은색과 흰색으로 번갈아 변하며 홍련과 바리의 심리를 보여준다. 홍련의 복수심과 분노가 타오를 땐 붉은색, 진실을 깨닫고 스스로를 용서한 홍련이 천도정을 떠날 땐 하얗게 변하는 원은 오늘날 여전히 존재할 또 다른 홍련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당신 잘못이 아니니 이젠 자신을 용서하라고. 당신을 끔찍이도 사랑한다고. 먼저 세상을 떠난 장화가 저승길에 오를 홍련에게 쓴 편지가 작품 주제도 되는 것이다.

<홍련>은 여성 서사 작품 속 남성 캐릭터의 역할도 제시한 작품이다. <홍련>엔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간 악인들(친부·계모)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바리를 보필하고 재판을 돕는 남성들인 강림·일직·월직이 배무룡과 계모의 역할을 번갈아 맡는다. 극의 중심 서사를 이끌어 가는 것은 분명히 홍련과 바리가 맞지만, 강림·일직·월직 또한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두 주인공의 감정을 끌어내는 역할 또한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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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강림은 바리에게 끊임없이 책임감을 상기시키며, 홍련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캐릭터다. 진실을 알게 된 홍련이 괴로워할 때, 강림은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려는 듯 손을 뻗다가 멈춘다. 아버지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언니를 잃고 자결한 홍련이기에, 남성인 자신이 무심코 손을 댔다간 또 다른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일직과 월직 또한 천도정을 떠나는 홍련에게 예를 갖추며 고개를 숙인다.

남성이 주도한 폭력 속에서 생을 마친 홍련에게 ‘그래도 세상엔 좋은 남자들이 더 많다’는 순진한 말 같은 건 들려줄 필요가 없다. 아픔에 짓눌린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에서 이른바 ‘유니콘’ 남성상도 함께 배치해, 악마 같은 남성과 대비시키며 보는 이에게 잘못된 환상을 심어주는 건 위험하다. 악인도 구원자도 평범한 남자도 아닌, 동정심 있는 인간의 눈으로 ‘홍련들’을 멀리서 바라봐주는 시선만 필요할 뿐이다. <홍련>의 강림, 일직, 월직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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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쇼노트

리지와 홍련, 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길 자처한 두 사람 사이엔 시공간의 간극이 크다. 동·서양을 관통하는 정서가 그토록 다른데도 가족에게 상처받은 여성들의 아픔이 닮았단 건 비극이다. 그보다 더한 비극은 오늘날에도 리지나 홍련처럼 가정에서 삶과 영혼이 찢겨 나간 여성들이 아직도 많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홍련> 바리의 마지막 대사, ‘이제 이 재판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란 말은 더욱 서늘하고 씁쓸하다.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가정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리지와 홍련의 재판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리지처럼 평생 얽매인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든, 홍련처럼 스스로를 벌하며 자학하는 것이든.

폭력은 소멸하지 않는다. 강자가 올바른 인간성과 도덕성을 갖지 못했을 경우, 약자를 짓밟고 괴롭히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인간은 본래 악한 마음을 타고났고, 악을 교화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친부를 처단한 리지의 사적 복수가 현실에선 충족하기 힘든 통쾌함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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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마틴엔터테인먼트

리지의 복수는 일직선이고, 홍련의 복수와 용서는 원 안에서 순환한다. 끔찍하게 괴로웠던 과거를 버린 후, 21세기 록스타의 옷으로 갈아입은 리지는 미래를 향해 달릴 것이다. 리지는 평생을 시달린 자신의 상처마저 되돌아보지 않는다. 반면 등장부터 퇴장까지 붉은 끈의 컨버스 운동화를 신은 홍련은 상처가 아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다친 곳을 괴롭힌다. 언니 장화를 향한 죄책감에서 친부와 자신을 향한 분노로, 분노에서 자학으로, 자학에서 다시 죄책감으로 원을 그리며 돌던 홍련의 길은 또 다른 자매인 바리가 끊어냈다. 바리는 이미 홍련처럼 자신을 탓하며 괴로워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자학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다.

그래서 폭력은 소멸해야 한다. 사라져야 할 폭력은 서로를 탓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기 학대를 말한다. 이미 생긴 상처를 온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약자끼리 연대한다면 생채기를 후벼파며 자학하는 손을 잡아줄 수는 있다. <홍련> ‘씻김’ 넘버에서 말하듯, ‘세상은 저만큼 흘러갔는데 우리의 얘기만 여기 멈춰 스스로를 증오하게 하는’ 것은 의미 없다. 세상이 흘러가도 악과 폭력의 힘은 여전히 강하겠지만, 연대와 용서의 힘 또한 더욱 강해질 것이다. 악한 인간만큼 선한 본성을 가진 이들 또한 많기 때문이다.


뮤지컬 〈리지〉 
2024.09.14.–12.01.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쇼노트 제작
STEVEN CHESLIK-DEMEYER, TIM MANER, ALAN STEVENS HEWITT / 연출 김태형

뮤지컬 〈홍련〉 
2026.02.28.–05.17.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마틴엔터테인먼트 제작
작·작사 배시현 / 작곡 박신애 / 연출 이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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