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과 인간이 마주하는 무대, ‘한 끗 차이’의 연출을 묻다

2026년 6월 전국에서 굿잔치가 벌어졌다. 5일 국악의 날을 맞아 굿을 소재로 하거나 굿을 무대에 올리는 작품이 꽤 나타난다. 국립남도국악원에서 ‘굿음악축제’ 일환으로 진도, 동해안, 제주 지역의 저승혼사굿을 무대에 올렸다. 국가유산진흥원의 ‘이 땅의 굿’ 시리즈로 <무악대전>이 민속극장 풍류에서 3일간 펼쳐졌다. 해원과 축원의 밤으로 충청도의 독경부터 전라도, 강원도의 무악, 공동체의 신명과 위로라는 주제로 경기도, 경상도(남해안)굿, 마지막 날에는 신과 인간이 마주하는 장엄한 위용으로 황해도 솟을굿이 연행되었다. 광무대에서 각 지역의 예인을 초청하는 <살아 있는 시간, 길 위의 명인>에서는 강릉단오굿의 빈순애 무당이 ‘축원굿’을 연행하였고, 고창농악의 당산굿 등을 영화와 미디어아트 등의 융복합으로 <시네마X굿 레퍼토리:샤이닝>이 극장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공개된 큰 굿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단옷날을 중심으로 하는 강릉단오제가 강릉 남대천 등에서 15일부터 22일 연행되었다. 28일에는 제주 큰 굿인 삼시왕맞이가 칠머리당영등굿 전수관에서 하루 온종일 열렸다.

굿을 소재로 하는 창작물도 눈에 띈다. 국악앙상블 불세출의 동해안 오구굿 장단을 기반으로 한 <밤쩌>가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작은 마당에서, 거창의 아시아 1인극제에서 방지원의 <영등굿:북해본풀이>가 올랐다. 2026 국제샤머니즘학회에서 강릉단오굿과 남해안별신굿을 소재로 한 <The강남>, 동해안별신굿을 기반으로 블루찬트의 <BIRTH: My Innermost Rite>가 소개되기도 했다. 음악가와 무당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굿은 그야말로 창작의 샘이자 무대에서 막차를 탄 전통예술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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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공을 들여 6월에 열린 굿 관련 공연을 나열하는 이유는 제목과 장소만 훑어도 공연예술 분야에서 굿이 지금 어떤 형태로 소비되는지를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굿의 무대화에 대해 논의되어야 할 지점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는 창작 작품은 일단 제쳐두고 무당과 악사가 중심이 되는 전통적 방식의 공연굿으로 한정하려 한다. 이 공연굿은 무대라는 공연예술의 기반 위에서 연행되기 때문에 평론의 범위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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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굿은 그야말로 무당의 주도 하에 실제 굿이 아닌 공연처럼 이루어지는 굿을 말한다. 뚜렷한 기주(굿 의뢰자)가 없을 수도 있고, 망자천도굿일 경우 망자 없거나 가상 망자를 세울 수도 있다. 공연굿의 시작은 여러 환경적 영향이 있겠지만 과거 무형 유산(옛 무형문화재)의 지정이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다. 1980년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등의 굿이 무형 유산 종목으로 지정된 이후 무형 유산의 전승과 보존이라는 취지에서 굿은 인위적인 환경에서의 제한된 형태를 가졌다. 당시 미신으로 몰고 폐해를 지탄하는 환경 속에서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굿의 예술적 측면을 부각시켜 전통이라는 바구니 안에 넣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조바심을 잠재운 것이다.(박미경, 2011) 굿의 유지 배경과 후계 지정의 평가를 무대공연의 방식으로 거치게 되면서 점점 고착화 되었다. 이미 굿이 가진 종교와 삶의 의례성은 퇴색된 지 오래였다. 이런 흐름은 예견된 것이므로 지금에 와서 옳고 그름을 논할 이유는 없다. 그저 현상이 어떻게 변화해오고 있는지 관찰할 따름이다.

벌써 40여년이 흘렀다. 굿의 공연화는 이제 굿의 한 부분으로 인정해야 할 지경이다. 진짜 굿을 벌일 기회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이를테면 미혼의 망자를 위한 망자혼사굿도 굿의 수요가 없었으며, 올해 망자혼사굿을 벌인 제주의 오용부 심방, 동해안굿의 김영숙 무당 등도 30여년 전에 했던 기억을 끄집어내야 할 정도였다. 그들 역시 국립남도국악원의 기획이 없었다면 저승혼사굿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공연굿은 대략 각 굿거리를 주관하는 무녀와 보존회의 반주자로 구성된다. 공연굿은 앞서 6월에 공연된 굿만 해도 5시간 길이의 굿, 통상적인 공연의 길이에 맞춘 2시간 길이의 굿, 프로그램의 한 부분을 차지하여 2~30분 이내로 연행되는 굿거리로 이루어졌다. 이는 무대라는 연행 환경에 따른 제약이 크다.

굿의 짜임에 있어서도 무대라는 영향력이 발휘된다. 어떤 장소든 굿은 장소에 맞게 굿이 변형되지만, 주최 측의 제안이나 보존회 내부의 안배에 좌우된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은 맥락에 맞지 않는 굿거리를 삽입하게 만들어, 도리어 굿의 진정성을 흐리기도 한다. 또 놀라운 지점은 무당이 이제는 무대의 문법에 적응하였다는 것이다. 동해안별신굿 역시 필자가 처음 보았던 2005년 대변리 별신굿에 비해 2026년의 저승혼사굿은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단어 사용에 있어서도 표준어를 사용하려 애쓰고 있었다. 물론 같은 무당이다. 이 역시 무대 경험이 쌓이면서 직감적으로 무대 문법을 수용하여 다양한 지역의 관객층을 수용하려는 전략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공연굿의 가장 큰 문제는 의례적인 맥락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굿을 주관하는 무당은 변명을 늘어놓기 바쁘다. “원래는 이렇게 하지 않는데 시간이 없어서..” 시간 뿐만 아니라 공간적인 맥락도 드러나기 어렵다. 망자천도굿의 넋건지기는 망자의 육신을 잃은 바닷가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나 무대에서 그대로 재연할 수는 없다. 굿을 연행하고 나서 태워야 하는 무구들이 있으나 무대에서는 불을 쓸 수 없다. 그러면 무당은 다시 말한다. “원래 태워야 하는데 여기 태울 수가 없어서…” 제면거리의 경우 무당이 떡을 구경꾼에게 나누며 복을 빌어야 하지만 극장에서는 취식이 불가능하다. 여러 공간적, 시간적 제약이 있음에도 나름 공연굿은 조율을 해가며 연행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과거 공연굿의 핵심 목적은 전승과 시연 더불어 복원에 있었다. 음악적 요소, 무무, 의례의 순서, 무가 사설 등의 굿의 요소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원형인가 또는 전형인가에 대한 평가가 내재 되었다. 그러나 이미 굿의 연행자가 무대 문법에 적응해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무대를 적극 활용하여 굿의 맥락까지 확실하게 드러내 줄 여러 장치가 필요하다. 공연굿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관점 역시 단순한 시연에서부터 공연예술 작품으로서 또는 의례의 목적이나 주제 메시지에 따른 맥락의 전달로 진화해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공연굿과 진짜 굿의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첫 번째이다. 진짜 굿은 사제자로서 의례성이 강조되며 이를테면 굿의 목적인 망자 천도를 위한 간절함이나 해원의 의미가 크다. 그러나 공연굿은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하므로 미적 경험이나 감상으로서의 예술성이 부각된다. 따라서 사제자 보다는 예술가의 영역이 더 확장된다. 지금의 상황에서 무당의 정체성은 장소에 따라 무게중심을 다르게 가져가는 것이 오히려 혼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무대를 사용하더라도 굿의 공간 구현에 대한 맥락은 가져갈 필요가 있다. 안에서 밖으로 나쁜 기운을 몰아내며 정화하는 단계를 공간의 제약으로 인한 핑계로 생략하기보다 맥락을 무대 안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맥락을 검증할만한 굿 연구자의 협업이 도움이 된다.

핵심은 굿의 공간적 맥락을 토대로 무대 문법을 통달하여 굿을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전문 연출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2026년 진도의 저승혼사굿의 예로 바닷가에서 해야 하는 넋건지기를 영상으로 미리 찍어 무대 위 굿으로 환원하여 구현하거나, 2019년 대륙시대 함경도 굿에서처럼 망자의 옷을 태우는 것을 대신하여 중정에 망자의 옷보따리를 모아 던지는 퍼포면스로 대체할 수 있다. 혹은 탈을 태우는 것을 AI를 활용하거나 조명과 무대 기술로도 충분히 설득시킬 수 있다. 굿의 특성을 무대에 적용하여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일반 공연과 달리 객석에 조명을 켜 놓고 굿을 진행하여 무당이 관객의 얼굴을 마주하며 소통한다던지, 마이크 꺼짐, 관객의 무대 난입 같은 돌발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인정(돈)을 무당에게 꽂아 복을 비는 행위는 관객이 어색하지 않도록 연출적으로 길을 터줄 수 있다. 연출은 전체를 컨트롤하며 안정적으로 무대를 진행할뿐더러 굿의 맥락과 문화적 특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연굿은 무당과 악사, 또는 보존회 차원에서 진행된다. 안타깝게도 굿의 의례적 의미가 무대에서 드러나지 않거나 병렬식으로 엮어내는 형태가 자주 발견된다. 관객은 그것이 예외적인지 통상 그런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므로 오해가 생긴다. 무대 문법을 모르는 가짜 연출은 아이디어만 보일 뿐 무대의 효과로 증폭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면 훈련되지 않은 몸짓은 다 들킨다. 당연히 무당은 공연예술에 훈련된 퍼포머가 아니므로 어색한 지점이 있다. 슬프지만 무당을 우습게 만드는 것은 한 끗 차이인 것이다. 그럼 무당을 퍼포머로 훈련시켜야 할까. 진실된 사제자로서의 존중은 그것마저 아우르는 연출로 가능하다. 이것이 무대에 통달한 전문 연출자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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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전통예술공연진흥재단 

굿의 맥락을 가져간다는 것은 어쩌면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소한 주의가 굿을 기술적, 예능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않고 문화 현상의 의례를 포괄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한다. 관객 역시 굿을 무대 위 신기한 현상이나 기예로 보는 것에서 문화의 범위 및 철학적인 깊은 이해로 더 확장할 수 있다. 또한 관객의 포지션 역시 구경꾼에서 참여자로의 전환을 통해 공동체적 의미를 덜 손상 시킬 수도 있다. 연출의 한 끗 차이가 작품으로서의 가치, 굿의 문화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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