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의 파도 속에서 상실을 건져 올리다 – 연극 〈감정 연습〉·〈사사로운 사서〉
창작집단 LAS 연극 <감정 연습>(이경헌 작, 신명민 연출, 2026.5.8~5.17,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 202)은 상실의 고통을 통과해 온 두 남자의 2인극이다. 공공도서관 보존서고에서 진행되는 김여작과 현성주의 비공식 독서동아리 활동은, 폐암 환자 김여작의 생이 막바지에 다다르며 종료된다. 두 사람 모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사별자다. 김여작은 사고로 떠난 아내의 죽음이 제 탓이라 확신한다. 현성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 송해원이 왜 죽었는지 몰라 자신의 감정을 여는 문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들의 독서 토론은 치유와 위로, 연대와 공감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김여작은 떠난 아내의 이름을 타인처럼 무미건조하게 부르는 현성주의 폐부를 찌르며 그가 감정을 토해내게 만든다. 그건 속내를 드러내는 법을 잊은 현성주를 위한 감정 연습이기도 하지만, 두 아내를 위한 뒤늦은 애도이기도 했다. 죽음의 원인을 머리로만 냉정하게 분석하던 현성주의 뜨거운 눈물도, 안정적인 삶과 양심을 버리고 돈에 미쳐 살던 김여작의 후회도 애도의 일부였다.

국립극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이 공동 기획한 연극 <사사로운 사서>(강현주 작·연출, 2026.6.20~6.28,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또한 공공도서관이 주요 배경이다. <감정 연습>의 도서관이 상실의 기억과 죽음의 단서를 모아 재조립하며 애도하는 공간이었다면, <사사로운 사서>의 북부도서관은 빗물에 유실될 뻔한 책들을 꺼내 올려 복원하는 공간이다.
상실의 순간을 간신히 붙잡아 책을 구조하는 사서들의 일상은 얼핏 보면 단조롭다. 물에 젖은 책들을 한 장씩 말리고, 글자들을 복원하고, 자원봉사자들을 인솔하며, 서로 아웅다웅하다가도 옛 기억에 잠긴다. 도서관에서 맞이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순간조차 조용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그들의 일상은 묵묵함과 성실함의 또 다른 이름이다. 물리적 상실을 막아낸 그들은, 마음속에 상실된 채 묻혀 있던 기억·죄책감·꿈을 복원한다.
<감정 연습>, <사사로운 사서> 모두 잃어버린 지 오래된 마음과 기억을 활자와 함께 되짚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감정 연습>은 이성과 냉정이란 감옥에 갇힌 슬픔과 애도를 석방하는 과정을, <사사로운 사서>는 보존서고와 빗물에 파묻힌 책들을 꺼내듯 잊힌 순간들도 복원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마음이 말라버린 남편, 감정으로 영혼을 해갈(解渴)하다 – 연극 <감정 연습>
연극 <서재 결혼 시키기> (이경헌 작, 신명민 연출, 2025.12.13~2025.12.21,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연작인 <감정 연습>은 자살 사별자 현성주를 극 중심에 뒀지만, 아내 송해원이 ‘왜’ 죽었는지 이유를 파고들지 않는다. 관객 또한 송해원의 자살 원인을 알 수 없다. 극에서 명확히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성주가 못 본 송해원의 옛 모습을 조금 더 아는 김여작 또한 그녀가 왜 떠났는지 모른다. 즉 작품 속 인물도, 관객도 ‘왜’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생전 송해원이 얼마나 반짝거리고 엉뚱했는지, 말도 없이 떠나버린 아내의 죽음에 현성주가 감당할 슬픔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만 해볼 뿐이다.
현성주가 알지 못해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이라면, 김여작은 지나치게 잘 알아서 괴로운 사람이다. 김여작은 자기 아내가 왜 세상을 떠났는지 알고, 송해원이 현성주를 사랑한 순간들을 목격했다. 김여작이 발견한 송해원의 ‘사랑’이 현성주를 만나러 가기 전 차에서 고데기로 머리를 세팅하던 사소한 순간일지라도, 그러한 사소함조차 자살 사별자가 된 현성주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아내가 왜 죽었는지 몰라 미쳐버린 남편에게, 아주 작은 ‘앎’은 터지기 직전의 물풍선을 바늘로 찌르는 것이다.
김여작이 인지한 것들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김여작의 앎은 현성주 감정을 채운 자물쇠를 열고, 김여작과 자식들 사이 관계를 변화시키고, 서로 간의 감정 또한 바꾼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예뻐 보이고 싶었던 여자의 행동은 슬픔을 무장한 갑옷을 벗겨낸다. 돈에 양심과 도덕을 팔며 살다 아내를 잃었다는 걸 잘 알아 죄인이 된 폐암 환자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식들에게 손을 내민다.

김여작의 오지랖 섞인 호의를 ‘감정 연습’이라 받아들인 현성주의 냉소는 건조해도 따뜻한 인류애로 변한다. 곁을 내주지 않던 현성주는 김여작이 좋아하는 믹스커피를 함께 마시고, ‘우리 건조하게 헤어집시다’라는 김여작의 마지막 부탁에 응한다.
무지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던 현성주는 전엔 몰랐던 송해원의 한 장면을 알고, 자살 사별자로 꾸역꾸역 살아온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며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책을 읽으며 몰랐던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와도 닮았다.
현성주와 김여작은 독서 토론으로 서로의 처지를 관찰하고 상처를 이해했다. 두 사별자의 독서를 통한 애도는 떠나간 아내들뿐만 아니라 자신과 서로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활자와 책은 상실의 고통을 비추는 거울이자 감정의 깨달음이라는 구원이었다.
빗물에 잠긴 건 삶이었다 – 연극 <사사로운 사서>
<감정 연습>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는 이들을 지켜보는 이의 상실을 다룬다. 반면 <사사로운 사서>는 상실의 순간을 붙드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침수된 책을 꺼내고, 물 먹은 책을 빳빳하게 복원하고, 옛 금서들을 희귀본의 자리에 재배치하고, 지난 기억과 꿈도 빗물에서 꺼내 올린다.
도서관의 의미는 저마다 다르다. 인문사회자연과학실 실장 재선에겐 어린 시절 추억과 죄책감을 묻은 곳, 1년 차 사서 시연에겐 사회생활의 시작이자 노력의 증거, 수서 담당 정윤에겐 커리어의 자부심, 정리 담당 대영에겐 옛 친구를 떠올리는 곳, 사회복무요원 창현에겐 잊었던 꿈과 새로운 동료를 만나는 장소가 도서관이다.
상실을 막으려는 이들은 북부도서관에서 일하는 이들뿐만이 아니다. 찾는 이가 없어 보존서고에 갇힌 책이 사라지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대출하는 이용자, 복원을 돕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 백여 명의 자원봉사자들까지. 이들은 대가 없이도 책을 찾고 물에 빠진 책들을 살린다. 이용자와 자원봉사자들에겐 도서관이 돈을 버는 일터가 아니다. 대사를 통해서만 엿볼 수 있는 이들의 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순수하다.

<사사로운 사서>의 책은 기억과 공간을 복원하는 공간으로도 기능한다. 실제 도서관을 명동예술극장으로 옮긴 듯한 압도적인 무대에 쌓인 책들은 빗물을 막는 담장이기도 하다. 보존서고에 들어차는 빗물은 종이책으로 대표되는 낡은 것과 오래된 것을 밀어내는 파도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구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을 삶으로 여기는 이들이 구조대를 자처하며 낡은 것, 밀려난 것, 잊힌 것, 사라질 것들을 새로운 물결에서 꺼내 올렸기 때문이다.
<사사로운 사서> 또한 <감정 연습>처럼 이들이 ‘왜’ 책과 활자와 인쇄물의 상실을 막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침수 사고를 묵묵하게 버텨내는 이들의 일상을 담담히 묘사할 뿐이다. 도서관 이용자가 줄어도,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대체돼도 사서들은 책과 공간을 정갈하게 보존한다. 보존서고의 책만 골라 주기적으로 대출하는 이용자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일부 자원봉사자들은 자발적으로 밤까지 일하며 책 복원에 힘쓴다. 비효율을 감당하며 책과 활자의 상실을 막아내는 이들의 사명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서재 결혼 시키기>, <감정 연습>의 송해원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알 수 없는 건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유가 지나치게 많기에 원인을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사사로운 사서> 인물들 또한 책과 도서관을 지켜내려는 이유가 각양각색일 것이다. 저마다의 사명감은 당연함이 됐고, 그러한 당연함은 삶이 됐다. 그리하여 <사사로운 사서>의 메시지는 보이는 것 그대로 명료하게 정의할 수 있다. 삶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가진 당연한 본능이다. 그래서 그들은 책을 지키고 복원했다.
무정한 상실을 견디는 방법
서울국제도서전은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고, 텍스트힙(Text Hip : 독서를 멋지다고 여기는 문화) 열풍은 사그라질 줄 모른다. 그럼에도 성인 독서율은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감정 연습>, <사사로운 사서> 모두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현실 또한 담담히 묘사한다. <감정 연습> 비공식 독서동아리 멤버는 현성주와 김여작 둘 뿐이다. <사사로운 사서>의 북부도서관 또한 이용자가 적고, 보존서고에 갇힌 책들은 수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침수까지 됐다.

음식은 유통기한이 있고, 종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부식되며 글자도 빛에 바래진다. 오늘날의 책은 sns와 텍스트힙 문화에 편승해 생명력을 겨우 연장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종이책, 활자, 종이를 넘기며 책을 읽는 행위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도서관이나 서점 등 책이 가득한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고요와 위로는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감정 연습>, <사사로운 사서> 모두 도서관 보존서고라는 공간에 대한 애착도 다룬 작품이다. 두 작품에서 보존서고는 단순한 배경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
<감정 연습>, <사사로운 사서> 모두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쓴 섬세한 대본, 사실적인 무대, 입체적인 캐릭터와 디테일한 대사들로 현실을 실감 나게 구현했다. 그러면서도 활자만이 만드는 낭만도 그려냈다. 인물들은 책을 매개로 만나고, 가까워지고,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되며 서로의 상처를 이해한다.
AI와 숏폼과 도파민에게 일상을 점령당한 빠른 시대에 무대에 오른 두 작품은, 예고도 없이 곁을 떠나는 무정하고 애틋한 것들을 다룬다. 시간, 감정, 기억, 사람, 사랑, 인생. 책은 늘 그 자리에 존재하며 천천히 바래지지만, 마음과 사람과 생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그래서 <감정 연습>과 <사사로운 사서>는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밀려오고 떠나는 시대에도, 느린 책이 존재하는 한 인류애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감정 연습>의 김여작은 죽어가면서도 책을 읽었고, 현성주는 영혼이 붕괴한 상태에서도 책과 김여작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마음 일부를 회복했다. <사사로운 사서>의 사서들, 자원봉사자들, 이용자들 또한 책을 살리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았다.
책은 혼자 읽는 것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감정 연습>과 <사사로운 사서>는 함께 책을 접하는 이들을 내세웠다. 두 작품은 상실로 인해 텅 비어버린 마음의 서고를 채울 수 있는 건 책과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극이 넘쳐나는 시대, 늘 그 자리에 있는 책이 사라지지 않을 이유다.
글/공연예술평론가 이진
제3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장려상 수상
서울예대 극작과 졸업
문화예술 플랫폼 <아트인사이트> 연극∙뮤지컬 PRESS 기사 연재
직장을 다니며 프리랜서 작가 활동을 하던 중, 제3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을 수상하며 공연 평론가로 등단했다. 영상 시나리오, 애니메이션, 소설, 오디오, 드라마, UX 라이팅 등 여러 분야에서 글을 써왔다. 무대는 연약한 존재가 삶에 맞서는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공간이라 믿기에 공연 비평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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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감정 연습〉
2026.05.08.–05.17.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 202
창작집단 LAS
작 이경헌 / 연출 신명민
연극 〈사사로운 사서〉
2026.06.20.–06.28.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국립극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작·연출 강현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