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형식, 질문을 닫는 설명 – 두산인문극장 〈모어 라이프〉
1.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는 극 행동에 참여하여 사건의 구성을 돕는 한편, 관객이 무대 위 사건과 거리를 두고 성찰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이 이중의 기능은 프로스케니온(무대)과 테아트론(객석) 사이, 코러스의 독특한 위치에서 비롯되었다. 이 임계적 공간에서 배우도 관객도 아닌 코러스는 극의 안과 밖을 동시에 점유했다. 무대와 객석의 엄격한 분리를 전제하는 근대극이 등장하면서,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이 존재는 설 자리를 잃었다. 코러스는 그 원동력이었던 특수한 위치로 인해 오히려 무대에서 추방된 것이다.
그렇게 퇴장하는 듯했던 코러스가 부활했다. 포스트드라마에 비켜주었던 문학성의 자리를 회복하려는 흐름, 중앙 원근법을 깨고 다중 관점을 확보하려는 동시대 연극의 지향이 죽어가던 형식을 다시 불러냈다. The Death of Tragedy (1961)에서 문학 비평가 조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는 코러스를 “비할 데 없이 유연한 장치”로 설명한 바 있다. 연극 비평가 디르크 필츠(Dirk Pilz)가 거듭 인용한 표현에 기대자면, 비극이라는 형식의 죽음을 선언한 스타이너의 관점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그 안에서 태어난 코러스만은 살아남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연극에 신선한 자극과 혁신의 동력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연극 〈모어 라이프〉(로런 무니・제임스 예이트먼 작, 민새롬 연출, 2026.4.29~5.17, 두산아트센터 Space111)의 무대는 이 계보에 있다. 무대에 놓인 하얀 원형의 단상은 고대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중앙에 올렸던 제단인 티멜레를 연상시킨다. 막이 오르면 각자 마이크를 손에 쥔 여섯 배우가 이 단상을 에워싸고 서서 사건의 배경을 서술한다. 마이크는 인물과 코러스 사이를 오가는 이들의 유연한 위치를 시각과 청각으로 전달하는 장치다. 여섯 배우는 극 중 인물이 되었다가 다시 코러스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그 경계의 자리를 지킨다. 화이트큐브를 닮은 간결한 무대는 배우와 그 몸만을 조명한다. 죽어가던 형식을 다시 불러온 선택이 이 작품에서 필연으로 읽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2.
브리짓 역의 이진경은〈모어 라이프〉의 형식적 실험에 단단한 설득력을 불어넣는다. 길을 건너던 중 자율주행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브리짓은 50년이 지난 2073년, 첨단 기술을 통해 인공 신체에 뇌의 데이터를 업로딩한 실험체로 깨어난다. 신체는 소멸했으나 인간의 감각과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포스트휴먼의 딜레마를 이진경은 정교한 몸짓으로 구현한다. 전원이 켜질 때마다 코러스의 목소리에 입을 맞추어 조금씩 달라지는 그의 움직임은 기계의 뻣뻣함을 입은 인체의 기묘하고 선득한 감각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반복된 실험 끝에 탄생한 브리짓이 남편 해리(이윤재 분)와 나누었던 기억, 해리의 현재 파트너 다비나(이주영 분)가 가꾼 정원의 아름다움, 커피 향의 감각을 복원해 내는 순간, 인공의 표면 아래 드러나는 미세한 호흡 변화와 흔들리는 눈빛은 이 경계의 존재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 묻는다.

죽은 몸에서 추출한 뇌 데이터, 그 데이터가 이식된 인공 신체,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고 가정되는 정체성이라 불리는 것. 낡은 판자를 하나씩 갈아 끼우다 결국 모조리 새 판자로 갈아 끼운 배가 여전히 같은 배인지 묻는 오랜 철학적 역설이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정체성이 물리적 실체, 즉 신체에서 온다고 본다면 2073년의 브리짓은 50년 전의 브리짓과 분명 다른 존재다. 그러나 존 로크(John Locke) 이래로 인격 동일성 논의가 씨름해 온 또 다른 축, 정체성이 의식과 기억의 연속성에서 비롯된다고 본다면 지금의 브리짓은 여전히 그때의 브리짓이다. 그러나 브리짓의 몸은 어떤 답도 하지 않은 채 무대 위에 서 있다.

3.
〈모어 라이프〉의 무대 연출은 디지털화된 인공 신체와 인간적 의식의 충돌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한다. 굳이 미래를 가리키지 않는 무대는 군더더기가 없고 스크린이 내뿜는 차가운 광원만이 낯선 공간을 밝힌다. 배우의 유기적 신체와 무대의 무기질적 감각이 병존하며 발생하는 긴장감은 그 자체로 첨단 기술 사회에서 명명되지 못한 존재들의 당혹감을 감각하게 한다. 그러나 빛은 언제나 무대 위 배우의 몸에 와서 부딪히고 그것을 통과해야만 관객에게 도달한다. 신체 없는 의식이라는 데카르트적 전제는 의식이 결국 몸을 거치지 않고는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연극의 본질은 그 자체로 데카르트적 오만에 대한 반박이다.

아쉬운 부분은 이 탁월한 형식적 선택을 온전히 품지 못하는 지점에 있다. 〈모어 라이프〉의 코러스는 이따금 과도한 설명으로 무대와 연기가 구축한 모호함을 지우고 열린 질문을 닫는다. 이러한 친절이 극대화되는 장면은 연구실에서 탈출하려는 브리짓과 이를 막아서는 빅터(김용준 분)가 충돌하는 1막의 절정이다. 연구 책임자의 이름이 빅터로 불린 순간 메리 셸리의 그림자는 이미 무대 전반에 짙게 깔린다. 그럼에도 갈등이 팽팽하게 고조된 이 순간에 다시 등장한 코러스는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하고 제목까지 일러준다. 연출과 배우의 정동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메워야 할 공백을 지나치게 친절한 코러스가 먼저 채워버린다.
4.
2막의 말미, 전원 버튼을 손에 쥔 브리짓은 삶을 지속하기로 선택한다. 이후 브리짓의 여정 역시 코러스의 서술로 일축된다. 극 전반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 설명 충동은 공교롭게도 삶에서 불확실성과 고통을 제거하겠다는 기술 자본의 약속과 닮았다. 〈모어 라이프〉는 경계의 자리를 택하고도 그 자리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불확실함까지는 미처 끌어안지 못했다. 판자가 모두 교체된 테세우스의 배가 스스로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임을 구태여 선언할 때, 그 확신은 도리어 힘을 잃고 만다.
그러나 아쉬움으로만 끝내기에 이 증상은 꽤 징후적이다. 더 많은 삶을 막는 고통과 노화, 죽음을 기술로 지우려는 시도는 언제나 인류가 좇는 욕망이며, 여백을 자꾸 채우려는〈모어 라이프〉의 코러스는 그 욕망의 언어적 변형이다. 무의식중에 형식이 주제를 앓았다.

다시 또 먼 미래. 해리가 죽고 다비나도 죽고 홀로 남은 브리짓이 인류의 마지막 장례식까지 지켜보았다는 결말은 극이 지금껏 끌고 왔던 질문의 방향을 조금 돌린다. 브리짓을 브리짓으로 증명해 줄 관계가 완전히 소멸했을 때도 브리짓은 브리짓인가. 관계의 배치로 규정되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남기고 막이 내린다.
생각해 보면 경계의 불확실성을 기꺼이 품을 수 없기에 우리는 인간인지 모른다. 설명하는 코러스의 개입도 삶을 지속하기로 한 브리짓의 선택도 결국 불확실함 앞에서 깔끔히 손을 놓지 못하는 충동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모어 라이프〉는 온기 없는 주제를 인체의 온도로 품는 지극히 인간적인 작품이다.
* 한국연극평론가협회 2026 봄 워크숍에서 작성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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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모어라이프〉
2026.04.29.–05.17. 두산아트센터 Space111
두산인문극장 2026 / 작 Lauren Mooney & James Yeatman / 연출 민새롬 / 번역 김수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