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극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애도에 머무를 권리

2026년 6월 19일부터 2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크리에이티브 윤슬의 청소년극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는 이로아의 소설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를 원작으로 한다. 

왝왝 포스터 사진

초라한 고백: 과정을 잊은 어른의 오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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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크리에이티브 윤슬

내 질문은 처음부터 엇나간 것이었다. 

공연을 보고 나온 뒤, 나는 하수구에 갇혔다. 처음에는 그것을 심연이라 읽었다. 그것은 가장 쉬운 독해였다. 이후 하수구는 망각의 공간이 되었고,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공간이 되었다. 나는 그 상징의 계보를 따라가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이 붙들고 있었던 것은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애도의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수구는 애도의 통로다. 하수구를 공간이 아니라 애도의 시간으로 읽는 순간, 이 공간은 더 이상 목적지가 아니라 통로가 된다. 이 작품은 통로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하라고 부추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통로를 이해하려는 이야기다. 통로를 빠져나오는 법보다, 아직 혹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애도의 과정을 청소년의 눈으로 읽어낸 것이다. 즉 애도의 과정 자체를 묻는다.

통로 역시 공간이다. 통로는 머물 수도, 돌아갈 수도, 지나갈 수도,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고민의 시간과 우물쭈물한 시간 모두 과정이다. 우리 사회는 그 통로를 자꾸 지름길로 만들려고 하고, 재선은 거기서 버티며, 연서는 걸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도를 끝내는 법이 아니라, 누군가의 애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고백한다. 하수구를 심연이나 망각으로 읽었던 것은 도착만 찾느라 머무름을 읽지 못한 어른의 오독이었다. 

청소년극의 청소년성: 과정을 겪는 존재들의 연대

청소년, ‘아직 모르겠어요’를 견디는 존재들. 정체성, 관계, 상실, 진로도 모두 진행형인 10대. 어른도 아이도 아니며 완료된 사람들이 아니라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들. 이 작품의 청소년성은 여기에 있다. 청소년은 목적지보다 과정에 머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지하차도 침수사건의 생존자인 연서는 기억의 무게와 현실의 요구 사이에서 흔들린다. 연서의 아버지는 애도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의 속도가 연서를 향해 작동하는 외부의 소리다. 그는 약을 버리고, 추모 게시판을 철거하며,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회복이 아니라 복귀다. 애도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자리에서 회복은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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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이자 재선이는 애도의 통로에 머무는 인물이다. 유가족인 그는 기억을 잃게 만드는 열매를 먹고도 끝내 기억을 버리지 못한다. 하수구 너머 무명의 세계에서 그의 기억은 사라지는 대신 나무가 되어 자란다. 재선이가 지키려는 것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를 기억하는 시간이다. 재선은 애도의 지속을 말한다. 

현실을 견디는 연서와 기억 속으로 침잠한 재선이는 하수구를 통해 마주한다. 현실과 기억은 대립하지 않는다. 둘의 만남은 애도의 서로 다른 시간이 마주치는 것이다. 연서가 재선을 만나기 위해 하수구를 통과해 무명의 세계로 가는 것은 기억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과 다시 관계를 맺기 위한 발걸음이다. 죽은 길고양이 ‘옥이’를 추모하는 행위는 그 통로를 건너는 첫 번째 용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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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크리에이티브 윤슬

혜민과 호정은 연서를 둘러싼 두 가지의 애도 방식이다. 혜민은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호정은 기억과 추모를 끝까지 붙든다. 두 사람은 애도의 방식과 속도가 하나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호정과 혜민은 연서를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속도의 애도가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앞선 잘못된 질문은 어른의 시각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극복은 했고? 회복은 아직이야?’라고 묻는 어른의 질문에 연서와 재선이는 ‘아직 모르겠어, 아직 거기 있어, 아직 힘들어’로 대답한다. 이 작품은 그 ‘아직’을 견뎌내는 청소년들의 시간을 보여준다. 

혜민과 호정의 연대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둘은 연서와 재선의 시간을 인정하고, 이 둘의 속도를 기다린다. 연대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견디는 일임을 혜민과 호정은 보여준다. 그 소리가 “왝왝”일지언정 “나 진짜 여기 있어”라는 외침으로 들어주는 태도. 그 긍휼과 기다림이야말로 이 작품이 말하는 연대의 윤리다. 

남겨진 사람의 시간: 애도에 머무를 권리

연극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에서 기억은 물소리, 즉 청각 이미지로 열린다. 빗소리는 보슬비에서 폭우로 청각적 이미지를 확장시킨다. 이 청각 이미지는 강조점인 폭우를 사이에 두고 남겨진 자들의 상태를 들려준다. 빗소리의 변화는 연서의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을 들려준다. 보슬비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고, 폭우는 여전히 현재를 덮치는 기억이자 감정이다. 

빗소리는 재선의 하수구 장면과 이어진다. 재선이 하수구에서 머무를 때 빗소리는 물방울 소리로 축소된다. 이때 물방울 소리는 리벌브를 사용해 음의 진폭 역시 감각하게 한다. 비가 세차게 내린 후 하수구의 물방울 소리는 ‘남겨진 시간’을 상징한다. 재선이에게 애도는 끝나지 않았는데 세상은 이미 지나가 버린 상태다. 보슬비를 눈물, 폭우를 집단적 슬픔이나 생존자나 유가족의 사무치는 감정의 심상이라면 하수구의 물방울 소리와 그 진폭은 갇힌 기억의 상흔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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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크리에이티브 윤슬

생존자와 유가족에게 부재는 ‘자리’로 남는다. 이 작품에서 망자의 흔적은 빈 의자로 형상화된다. 의자는 비어 있는 순간부터 ‘누가 없는가’를 드러낸다. 의자는 빈자리이자 남겨진 자리, 돌아오지 못한 자리를 물질적으로 현전시키는 오브제다.

그러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이 빈 의자는 기억나무를 뽑는 무브먼트의 도구로 전환되면서 상징의 일관성을 잃는다. 앞선 장면에서 부재와 기억의 물성을 획득한 오브제가 마지막에서 기억을 처리하는 방식이자 행위의 중심 오브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때 뽑는 행위가 기억을 제거하는 행위인지, 기억을 붙드는 방식의 변화인지, 혹은 기억을 끝맺는 의식인지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하나의 오브제에 서로 다른 연극 언어가 중첩되는 순간, 상징은 확장되기보다 충돌한다. 그 결과 오브제가 획득했던 기호와 의미는 흔들리고, 하이라이트의 상징은 오히려 과부하를 일으킨다. 

박탈된 애도: 궁핍한 공감, 가난한 이해

우리는 정말 애도를 끝낸 것인가? 아니면 애도를 중단당한 것인가? 

이 둘은 전혀 다르다. 애도를 끝낸 사람은 자신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애도를 중단당한 사람은 그 시간이 끊긴 자리에서 계속 머물게 된다. 만약 ‘이제 밖으로 나오자’를 말하고 싶다면 그 전제가 중요하다. 충분히 울었는가. 말했는가. 추모했는가. 함께 연대했는가. 여기에 대한 답이 없이 ‘현실로 돌아와’라는 제안은 누군가에게는 구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 

때문에 이 작품의 질문은 단순히 참사나 추모의 문제가 아니라 ‘회복을 말한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 작품은 기억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보여준다. 연서는 그 통로를 건너고 있고, 재선이는 그 통로에 머물러 있다. 

속도를 생존의 윤리로 만든 대한민국.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정확하게, 목표를 겨냥해서 전력으로 질주해야 살아남는 대한민국. 이 사회에서 머무를 권리는 사치로 보인다. 다들 뛰는데 넘어졌다고 앉아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사치며, 현실을 모르는 어린이의 칭얼거림으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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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크리에이티브 윤슬

애도의 유통기한은 과연 누가 정하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타인의 슬픔에 종료 시점을 요구하기 시작했는가? ‘애도도 빨리해, 추모도 적당히 해, 잘못도 인정했으면 됐잖아, 상처도 이제 극복해, 정신력으로 버텨’. 공동체에는 생산성을 개인에는 효율성을 요구하는 이 시대는 이제 추모에도 생산성을 애도에도 효율성을 강요하며 속도와 종결을 요구한다. 

사실 인간 감정의 속도는 LTE가 아니다. 슬픔은 다운로드가 아니고, 애도는 업데이트가 아니며, 추모는 완료 버튼을 누른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죄책감, 상실, 그리움도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마저도 빠르게 정리되기를 원한다. 애도는 언어로 설명되면 해결된 것으로 간주 되고, 추모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종료된다. 상처는 극복의 서사로 환원되고, 남겨진 사람에게는 현실 복귀가 요구된다. 기억하자고 말하면서도 너무 오래 기억하는 사람을 불편해하고, 슬퍼하라고 말하면서도 충분히 슬퍼하는 사람을 견디지 못한다. 또한 기억하라고 하지만 정작 기억을 함께 감당할 사회적 장치는 없는 상태다.

청소년극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는 바로 그 말소리만 요란한 궁핍한 공감과 가난한 이해에 질문을 던진다. 유통기한 없는 애도에도 유통기한을 만들어내야 하는 한국 사회. 이 작품이 끝내 묻고 있는 것은 애도가 아니라, 타인의 슬픔조차 기다려주지 못하는 우리의 속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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