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 〈그의 어머니〉 부성(父性)과 모성(母性), 몸부림치다
부성(父性)의 사전적 의미는 ‘남성이 아버지로서 가지는 정신적·육체적 성질. 또는 그런 본능’이다. 모성(母性)의 사전적 의미 또한 ‘여성이 어머니로서 가지는 정신적·육체적 성질. 또는 그런 본능’으로 거의 동일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본능’이란 단어다. 본능은 사전에서 ‘어떤 생물체가 태어난 후에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이라 설명한다. 부성과 모성 모두 후천적으로 학습되거나 사회적으로 강요받은 것이 아닌, 타고난 감정이라 정의한 것이다.
극단적인 모성과 부성을 다룬 작품들은 많다. 영화 〈마더〉, 〈케빈에 대하여〉 등 악(惡)을 행한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 혹은 영화 〈테이큰〉처럼 잃어버린 딸을 구출하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그렇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외부 요인과 갈등하거나, 자기 자신과 내적 갈등하는 부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형태·장르로 변주되고 있다. 무대극 또한 그렇다.
2025년 1월 7일부터 3월 3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 〈세일즈맨의 죽음〉은 아버지이자 주인공 ‘윌리 로먼’의 부성을 다뤘다. (해당 작품은 (유)쇼앤텔플레이·(주)T2N미디어가 제작했으며, 서울 공연을 마친 후 2025년 3월부터 5월까지 부산·대구·용인·인천·수원·의정부에서 전국의 관객을 만났다.)
국립극단이 제작하고 국립극단과 국립극장이 공동 주최한 연극 〈그의 어머니〉초연은 2025년 4월 2일부터 4월 19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됐다. 2026년 명동예술극장으로 무대를 옮긴 〈그의 어머니〉 재연은 4월 16일부터 5월 17일까지 다시 관객을 만난다. 〈그의 어머니〉는 어머니이자 주인공 ‘브렌다 카포위츠’의 모성을 다뤘다.
아서 밀러가 집필한 〈세일즈맨의 죽음〉은 1949년에 발표됐고, 에반 플레이시 〈그의 어머니〉는 2008년에 쓰였다. 이렇듯 두 작품 사이엔 60여 년이란 세월의 간극이 있음에도 시간을 뛰어넘는 공통된 정서가 존재한다. 도덕적 결함이 있는 큰아들에 대한 뒤틀린 집착이다.
두 작품 모두 가족극을 표방했지만,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장남(長男) 사이에 흐르는 감정선과 애증을 깊게 다루고 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자식들이 형제 딱 두 명인데, 작은아들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다는 점도 동일하다. 이는 등장 장면뿐 아니라 주인공 윌리·브렌다의 마음속 무게감 또한 그렇다는 뜻이다. 뜻대로 자라주지 않았더라도, 모자란 자식일지라도 큰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대하게 되는 정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다.
두 극의 윌리·브렌다는 가족 전체를 지키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그렇다. 하지만 그들은 큰아들을 가장 신경 쓴다. 윌리·브렌다는 가장, 즉 가족의 리더이기도 하다.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고, 강하게 살아야 하지만 마음은 약하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끊임없는 압박을 견디고 이겨내던 그들의 광기(狂氣)는 폭발한다. 그들이 미친 이유는, 큰아들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연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환각(幻覺)이 된 환상(幻想) –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2025)

윌리 로먼은 늙은 세일즈맨이다. 윌리는 60대의 나이에도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고된 외판원 일을 하고, 집 대출금을 25년째 갚는 성실한 가장이다. 하지만 그에겐 도덕적 결함이 있다. 과거에 출장차 갔던 보스턴에서 불륜을 저지른 것이다. 아들임에도 ‘별’, ‘헤라클레스’ 같단 말이 나올 정도로 외모도 훤칠하고, 촉망받는 풋볼 선수였던 장남 비프는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다. 수학 시험에서 낙제해 대학 진학이 위태로웠던 비프는 그 충격으로 운동도 그만두고, 전도유망하던 자기 자신을 놔버린다. 현재, 서른네 살이 될 때까지 안정적인 직업을 못 구한 비프는 도벽도 고치지 못했다. 빛나던 과거는 허무하게 사라진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찬란했던 과거와 희망 없는 현재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현재의 비참함을 강조한다. 희망은 단지 재산이나 직업의 유무가 아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다. 윌리는 큰아들 비프가 스포츠 스타가 될 거라 기대했다. 자신이 버는 돈과 차원이 다른 천문학적인 거액을 벌어다 줄 것이라 꿈꿨기에 그를 더 우러러봤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순진하고, 낙관적이고, 어리석은 희망과 숨 막히는 기대는 비프를 완전히 엇나가게 했다.
로먼 가의 가족 구성원은 아내 린다, 큰아들 비프, 작은아들 해피다. 윌리는 린다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늘 자식들 걱정을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 건 큰아들 비프다. 작은아들 해피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린다 또한 아내로서, 형제의 어머니로서 존중하거나 아낀다기보다 그냥 사는 것처럼 보인다. 린다를 진심으로 소중히 여겼다면 부정을 저지르고 큰아들에게 들키는 일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윌리는 미식축구 에이스였던 비프를 남자 대 남자로서 동경했고, 불륜을 들켰을 땐 아버지로서 두려워하고 죄책감을 느꼈다. 그런 감정은 아내 린다에게 먼저 느껴야 하는 것이다. 내연녀에겐 새 스타킹을 사주는 그는 낡은 스타킹을 꿰매는 린다를 보며 짜증을 낸다. 강자 앞에선 약해지고, 약자 앞에선 강해지는 남성의 속성이 여기서 드러난다. 윌리에게 아내 린다는 약자고, 아들이지만 잘난 남자를 대하듯 우러러보고 희망을 걸었던 비프는 철저한 강자였다.
그는 또한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부정이 촉망받던 비프를 망가트렸단 걸 알고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비프는 사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러 간 자리에서 만년필을 훔쳐서 도망치는 기행을 저지르고, 집에선 아버지에게 수십 년간 쌓인 원망과 분노를 쏟아낸다. 그가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실망하고, 인생도 포기하기 시작했던 순간은 윌리의 외도를 본 날부터였다. 하지만 그건 ‘계기’일 뿐, 비프는 내면에 차곡차곡 스트레스를 쌓으며 엇나가고 있었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비프는 감옥 생활도 했었고, 현재도 도움을 구하러 간 중요한 자리에서 만년필을 훔칠 정도로 정신적으로 위태롭다. 자신을 시급 1달러짜리 싸구려 인생이라 자조하는 비프는 아버지가 과거에 자살을 시도했단 걸 알고도 남처럼 냉정하다. 하지만 비프는 명백히 윌리의 아들이다. 윌리 또한 비프처럼 마음의 병을 오래 앓아왔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도덕적 결함과 정신적인 불안이라는 유산(遺産)을 물려줬다.
윌리는 생전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번 형 벤의 환각을 오랫동안 봐왔다. 한땐 꿈이자 희망이었던 비프가 자신은 시급 1달러짜리라며 차가운 현실을 일깨워준 후, 윌리는 알래스카에서 2만 달러를 벌었단 벤의 환각을 보곤 홀린 듯 따라간다. 이미 세상을 떠난 형을 쫓아간다는 건 죽음을 뜻한다. 윌리는 자동차 사고를 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가족에겐 거액의 사망 보험금이 지급된다.
비프가 스포츠 스타가 돼 벌어준 돈도 아니고, 형처럼 사업에 성공해 번 돈도 아닌, 목숨과 맞바꾼 돈으로 윌리는 집 대출금을 죽어서야 전부 갚는다. 아버지이자 남편의 장례를 치르는 가족들에겐 슬픔이 드리웠지만, 벤의 환각을 춤추듯 경쾌하게 따라가는 윌리의 마지막은 행복하다. 비프의 분노에서 ‘그 애가 날 완전히 싫어하진 않는다’는 걸 읽었고, 드디어 아버지로서 장남에게 돈이라는 유의미한 유산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연약한 몸, 인간 방패가 되다 – 연극 〈그의 어머니〉(2025)

남편과 헤어지고 홀로 두 아들을 키우는 브렌다 카포위츠는 집이란 감옥에 갇혔다. 열일곱살 큰아들 매튜가 하룻밤 사이 여학생 세 명을 성폭행했기 때문이다. 가택 연금을 당한 매튜와 함께 집에 구금된 브렌다는 큰아들을 24시간 감시한다.
그녀는 아직 어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둘째 아들 제이슨도 필사적으로 지킨다. 가족들의 집 앞엔 기자들이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있다. 일상생활도 못 하는 자신과는 달리 아직 아홉 살인 제이슨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 매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제이슨은 형과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엄마의 이상한 행동,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이해 못 한다. 그래도 브렌다는 제이슨을 매튜로부터, 황색 언론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려 발버둥 친다.
연극 〈그의 어머니〉의 핵심은 브렌다가 느끼고 보여주는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감정과 표정들이다. 그녀는 분명히 죄를 저지른 매튜에게도 아직 모성을 갖고 있다. 반대로, 도저히 견디기 힘든 추악한 짓을 저지른 아들에게 엄마로서 분노와 증오 또한 들끓는다. 매튜가 ‘남자’로서의 욕구를 내보이며 죄인이 됐단 사실을 알았을 때, 브렌다는 그와 한집에 머물러야 하는 ‘여자’로서도 아들을 날카롭게 경계한다.
브렌다가 매튜에게 느끼는 증오심은 집 안에서만 표현된다. 매튜는 여학생들의 영혼과 인권은 파괴했지만, 어린 남동생은 진심으로 아낀다. 브렌다는 함께 게임을 하는 형제, 자기 옷을 동생에게 주는 매튜를 감시하고 억압하며 통제한다. 가택 연금을 당해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매튜를 제이슨에게서도 분리하며, 마지막 청정 구역만은 지키려는 것이다. 강한 엄마지만, 브렌다는 매튜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은 본능적으로 꺼리며 움츠러든다. 매튜의 여자 친구인 제시카가 집에 찾아와 그를 만나겠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순간도 불편하다. 성범죄를 저지른 남자인 매튜가 또다시 뭔 일을 할 까봐 두렵고 불안한 것이다. 이처럼 브렌다는 여자로서, 엄마로서 매튜를 절대 믿지 않는다.
브렌다는 매튜를 증오한다. 스스로의 인생을 망치고, 아직 어린 제이슨의 앞길도 막고, 무엇보다 엄마로서 오랫동안 헌신한 자신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아들들을 지키려 애쓰던 브렌다는 매튜에게 지독하게 솔직해서 이기적인 분노를 터트린다. 너한테 남은 건 이젠 증오밖에 없고, 제이슨만은 잘 키우고 싶다고.

하지만 브렌다의 감정적 폭발은 집 안에서만 이뤄질 뿐이다. 집 밖, 즉 남들 앞에선 브렌다는 여느 어머니처럼 아들을 보호한다. 현관에서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갔을 뿐인데, 브렌다는 광기에 가까운 처절한 모성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말 그대로 온 몸이다. 뭐라도 캐내려 쉴 새 없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리는 기자들 앞에서 브렌다는 옷을 벗고 나신을 드러낸다. 집 안을 향하고, 아직 어린 제이슨을 겨누는 플래시 앞에서 브렌다는 절규한다. 차라리 날 찍으라고. 그녀의 몸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가족을 지키는 방패가 된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는 카메라의 섬광에 브렌다는 기꺼이 수백 번을 찔리며 피눈물을 흘린다.
성범죄자 아들의 어머니가 기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단 건 황색 언론이 물어뜯기 좋은 가십이다. 그녀의 행동은 감정적인 충동과 일탈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한편으론 일부는 철저하게 계산된 행위일 수도 있겠다. 매튜에서 브렌다로 사람들의 이목이 완벽하게 쏠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잠시나마 아들을 지켰다. 장면과 배우의 연기는 파격적이고 폭발적이지만, 무대 안쪽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뒷모습만을 노출한 계산된 연출과도 맥이 통한다. 내용과 연출 모두 감정적으로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치밀하게 짜였기 때문이다. 1막 엔딩인 이 장면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면서도 현실적이다. 아들의 성(性) 문제에 연루된 엄마들은 상상 못 할 행동을 종종 하니 말이다. 모성이 아름답다는 건 그저 환상이다.
이처럼 1막 엔딩에선 브렌다 홀로 기자들 앞에 서지만, 2막 엔딩에선 그녀와 매튜는 함께 손을 잡고 집을 나선다. ‘넌 내 아들이잖아’라며 그와 함께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온몸으로 견디는 브렌다. 건축 디자이너인 그녀는 자신이 만든 가정을, 자식을 흠 없이 완벽하게 설계하는 덴 실패했다. 하지만 집 밖에서만큼은 세상으로부터 아들들을 보호하려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여자, 어머니, 그리고 평범하고 입체적인 인간이었다.
가족을 지키려는 몸부림, 속박을 털어내는 몸짓

〈세일즈맨의 죽음〉, 〈그의 어머니〉 모두 가족을 지키기 위한 부모의 처절함이 춤인지 몸부림인지 모를 기묘한 움직임으로 표출된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윌리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어머니〉는 1막 엔딩에서 부성과 모성의 광기가 클라이막스에 달한다.
〈세일즈맨의 죽음〉 윌리는 알래스카에서 거액을 번 형 벤의 환각을 경쾌한 발걸음으로 쫓아간다. 윌리는 가족에게 자신의 사망 보험금을 주기 위해 교통사고를 내며 삶을 끝낸다. 더없이 비참한 결말이지만, 춤추듯 가볍게 형의 환상과 돈을 따라가는 윌리의 뒷모습은 어린아이 같다. 윌리의 첫 장면은 일을 마치고 고된 발걸음을 옮기며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의 발걸음은 전혀 다른 양상을 띤다. 삶, 즉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죽음 같고,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건 살기 위해 떠나는 모습과도 같았다.

〈그의 어머니〉 브렌다가 집 앞을 진 치고 있는 기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 동작과 연기는 행위예술 같다. 행위예술(行爲藝術)은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이나 내용을 신체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예술을 뜻한다. 브렌다가 세상에 표현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브렌다는 피해 여학생들을 원망하고, 자극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들을 욕하고, 언론에 유리하게 보일 행동을 연출하는 변호사 로버트에게 선 넘지 말라고 경고도 하는 평범하고 이기적인 엄마다. 하지만 그녀는 성범죄자인 아들이 결백하다거나, 죄가 없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우연히 만난 피해 여학생의 어머니가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무너지기도 한다. 그녀가 지키고 싶었던 건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큰아들 매튜가 아닌 가족과 일상, 그리고 집이었다.
두 장면 모두 배우에겐 연기력과 무대 내공을 드러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춤이나 행위예술이 아닌 몸부림에 가까운 기괴한 모습은 아들을, 나아가 가족 전체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건 지키려는 몸부림이기도 하지만 털어내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몸부림을 통해 자기 자신을 털어냈다.
〈세일즈맨의 죽음〉 윌리는 세상을 떠난 형의 환상을 따라가며 목숨을 버렸다. 〈그의 어머니〉브렌다는 하이에나 같은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 스스로 사냥감이 되어 여성의 존엄성을 잠시 포기하고 가족을 지켰다. 가족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떳떳한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고, 화살처럼 날아드는 플래시 세례에 맞서 기꺼이 인간 방패가 되는 모습에선 처절함을 뛰어넘은 숭고함이 보인다. 윌리 로먼과 브렌다 카포위츠를 보며 부모님을 떠올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족은 가장 가깝지만, 때론 가장 멀게도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존재다. 윌리와 브렌다 또한 이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과 〈그의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존재와 어떻게 공존할지도 사유하게 하는, 서늘한 경종을 울린 작품이었다
글/ 공연예술평론가 이진
연극 〈그의 어머니〉
2025.04.02.–04.19.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국립극단 / 원작 에반 플레이시 / 연출 류주연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2025.01.07.–03.03.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원작 아서 밀러 / 연출 김재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