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 브러쉬씨어터 〈플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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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쉬와 플리백: 80년을 건너 만난 이란성 쌍둥이
1947년 미국. 한 여자가 뉴올리언스에 도착해서 이런 대사를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공동묘지행 전차로 갈아탄 뒤, 여섯 블록을 더 가서 엘리시안 필즈에서 내리라고 했어요”.
‘욕망’이라는 전차는 공동묘지를 거쳐 엘리시안 필즈에 도착한다. 그러나 낙원을 뜻하는 그 지명은 블랑쉬에게 구원이 아니라 정신적 붕괴의 종착역이 된다. 2013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이 비슷한 결을 지닌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피비 월러-브리지(Phoebe Waller-Bridge)의 <플리백>(Fleabag)이다.
블랑쉬도 플리백도 도착한 곳은 모두 관계의 폐허다. 두 인물에게 섹스는 각각 ‘사랑받고 싶다’와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의 도착점이다. 블랑쉬는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줄 것이라는 환상 속에 살고, 플리백은 자신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살아간다. 블랑쉬는 자신의 붕괴를 환상으로 덮고, 플리백은 알면서도 자기파괴의 행위를 반복한다. 타인의 시선 속에 사는 블랑쉬와 타인의 시선은 알지만 계속 부수는 플리백. 모르면서 혹은 알면서 하는 자기파괴와 혐오.
두 인물에게 섹스는 욕망이 아니라 증상이다. 그것은 관계를 상실한 몸이 관계를 대신하기 위해 선택한 자기파괴의 방식이다. 80년이라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은 관계의 상실을 몸으로 견디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비춘다.
보이는 몸과 소모되는 몸: 도덕과 윤리의 경계
우선 분명히 할 것이 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플리백>에서는 섹스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섹스’는 관계를 탐하는 인물의 방식으로 제시된다. 블랑쉬와 플리백 모두 관계를 욕망해서 침대에 오르지만, 끝내 도착하지 못하는 곳은 바로 ‘관계’다. 즉 두 인물 모두 실패한 것은 섹스가 아니라 관계인 것이다.
블랑쉬는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요조숙녀’로 연출한다. 그녀는 늙음을 어두운 조명으로, 화려한 옷과 향수로 포장한다. 나이가 적건, 많건 어느 남성에게도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블랑쉬. 그녀는 처음 만난 날에도 제부인 스탠리에게 샤워 후, 드레스 지퍼를 올려달라고 하며 여성성을 드러낸다. 게다가 고향인 벨 레브에서 교사로 지낼 당시 17세 학생과 관계를 갖는 등 도덕적 경계를 넘는다. 블랑쉬에게 결점은 미성년자 성 착취에서 타인과 자신을 파괴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이것이 사랑받기 위해 블랑쉬가 선택한 도덕적 파열이자 비극적 결점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의 이유가 남편 앨런의 동성애와 자살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플리백은 모두 성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 관계들은 친밀함보다 공허를 잊기 위한 반복 행위에 가깝다. 그녀는 타인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보다, 자신을 자발적으로 내어주는 관계 속으로 반복해서 들어간다. 성도착적 페티시를 강요하는 전 남자친구, 하룻밤 상대로 항문 섹스를 유도하는 남성, 가슴을 만진 형부까지 플리백이 만나는 남성들 대부분은 그녀를 온전한 인격보다 성적 대상으로 소비한다. 남성들은 관계를 약속하거나 지속하지 않고, 플리백 역시 관계를 지속할 힘을 잃은 채 섹스와 자위를 반복한다.
사실 도덕적으로 플리백의 선택은 결점이 없다. 자기파괴가 범죄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녀는 타인을 파괴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소모한다. 이 지점에서 플리백은 윤리적 경계를 넘는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윤리적 선택에서 플리백은 자기혐오에서 비롯한 자기소모의 결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인물은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만, 몸을 사용하는 방식은 다르다. 두 인물 모두 관계를 갈망하지만, 블랑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랑을 구하고, 플리백은 자기 자신을 소모하며 연결을 구한다. 블랑쉬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섹스를 반복하고, 플리백은 자기혐오를 견디기 위해 섹스를 반복한다. 즉 블랑쉬는 ‘보이는 몸’을 만들고, 플리백은 ‘소모되는 몸’을 만든다.
이 지점에서 두 인물의 차이가 드러난다. 블랑쉬가 넘는 것은 사회가 정한 도덕의 경계다. 미성년자와의 관계, 교사로서의 책임, 당대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한 그녀의 선택은 사회적 심판의 대상이 된다.반면 플리백이 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윤리의 경계다. 자기존중이 없는 관계, 자기혐오, 자기기만은 법으로 처벌되지 않지만, 스스로를 끊임없이 파괴한다.
따라서 블랑쉬에게 던질 질문은 ‘타인에게 무엇을 했는가’이고, 플리백에게 던질 질문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블랑쉬의 비극이 사회적 도덕의 심판에서 비롯된다면, 플리백의 비극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무너진 윤리의 문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는 몸은 사회의 도덕적 시선 앞에 놓이고, 소모되는 몸은 자기 자신의 윤리적 시선 앞에 놓인다.
관계 상실의 장: 처벌자와 징벌방
두 작품의 주된 공간인 스텔라의 집과 부의 카페는 소유의 장이 아니라 관계의 장이다. 블랑쉬도 플리백도 끝내 공간 안에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 관계가 무너질 때 공간 역시 함께 상실한다. 다만 블랑쉬는 타인에 의해 축출되고, 플리백은 스스로 떠나지 못한 끝에 공간을 잃는다.
벨 레브를 잃은 블랑쉬는 플라밍고 호텔에서 관계의 상실을 일시적 성관계로 메우려 했다. 플라밍고 호텔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관계의 상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장소다. 그러나 그 경험은 현실을 회복하기보다 환상이 현실을 대신할 수 없음을 거듭 확인하게 만든다. 이후 블랑쉬가 도착한 스텔라의 집은 그 상실을 되돌려 보려는 마지막 시도가 된다.
스텔라의 집 역시 블랑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집의 실질적 주인인 스탠리는 블랑쉬의 과거 잘못을 심판하고, 폭로한다. 게다가 스탠리는 스텔라가 출산하는 날, 이 집에서 블랑쉬를 강간한다. 스탠리가 블랑쉬에게 가하는 성적 폭력은 그녀의 태도에 근거한 당연함이 아니라 그만큼 가혹하고 잔인한 사회적 폭력이기도 한 것이다. 더불어 이 장면은 블랑쉬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결정적 순간이자 현실의 붕괴가 된다.
이 집에서 스탠리는 블랑쉬에게 가부장적 도덕 질서를 집행하는 처벌자이자 사회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의 대리인으로 존재한다. 블랑쉬는 다시 찾은 삶의 공간에서 축출되고, 끝내 정신병원이라는 감시와 수용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블랑쉬의 이동은 사회적 시선이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결국 감시와 수용의 공간만이 그녀를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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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플리백의 집은 사적 공간이자 은밀한 처벌 공간이다. 혼자 자위하고, 술 마시고, 남성들에게 소비당하는 사적 징벌방이자 독방이다. 공적 공간인 카페는 절친한 친구인 ‘부(Boo)’와 함께 한 공간이었지만, 부가 죽은 후 카페는 속죄의 공간이 된다. 애착이 없는 기니피그 힐러리가 있고, 손님에게 즉석식품을 데워 제공하는 등 실질적으로 운영할 이유가 없는 파산 직전의 카페. 즉 일상적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속죄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플리백은 이 공간에 매일 출근하면서 기니피그 힐러리를 돌보며 부에게 저지른 자신의 죄를 곱씹는 의식을 되풀이한다. 카페를 떠나는 것은 부를 떠나는 일이며, 죄책감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플리백은 파산 직전의 카페를 끝내 떠나지 못한다. 카페는 생계의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과한 징벌방이기 때문이다.
이 징벌방에서 플리백은 자기 자신을 훨씬 냉정하게 인식한다. 그녀의 자기 인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기니피그 힐러리의 죽음이다. 지하철 남자가 힐러리를 두세 차례 걷어차고 떠난 뒤에도 플리백은 곧바로 힐러리를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또다시 자기처벌의 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고통에 이빨을 부딪치는 힐러리를 제 손으로 압사시키며 오열한다.
힐러리는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니다. 작고 연약하며, 돌봄이 필요하지만, 타인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 존재다. 더불어 힐러리는 상처와 죄책감을 비추는 플리백의 또 다른 자아로 읽힌다. 고통에 떠는 힐러리를 끝내 안아 죽이는 플리백의 행위는 타인을 향한 폭력이라기보다, 끝나지 않는 고통을 멈추고 싶은 자기 자신을 향한 처벌의 전위가 된다.
이 장면은 존을 만나기 전, 자기처벌이라는 방식이 이미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계기다. 부의 카페에서, 부의 반려동물을 제 손으로 죽이는 순간, 플리백은 자기처벌이라는 방식이 끝내 아무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결국 블랑쉬는 사회가 만든 처벌의 공간으로 추방되고, 플리백은 스스로 만든 징벌방마저 끝내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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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붕괴와 자기처벌의 균열: 변수의 등장
블랑쉬에게 마지막 보루였던 스텔라의 집, 그 집에서 만난 미치는 그녀에게 희망의 변수였다. 블랑쉬는 미치의 선택을 기다리며 구원을 바랐지만, 그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미치 역시 가부장적 도덕과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미치의 거절 이후, 블랑쉬의 세계를 결정적으로 뒤흔드는 변수는 스탠리이다. 스탠리의 성폭력은 그녀의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계기가 아니라, 끝내 환상을 붕괴시키는 사건으로 작동한다.
그래서 블랑쉬의 인생에 희망이라는 변수는 없다. 결국 그녀는 “나는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존해왔어요”라며 의사의 손을 잡고 떠난다. 그녀는 정신병원 의사의 친절마저 환상 속으로 흡수한다. 이처럼 블랑쉬는 끝까지 타인의 친절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 믿는다. 미치에게는 사랑을, 낯선 의사에게는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다.
블랑쉬가 만나는 모든 타인은 기존의 질서를 반복하거나 수행할 뿐, 그녀의 세계를 바꾸는 변수는 되지 못한다. 심지어 스탠리는 그녀의 환상을 무너뜨릴 뿐 새로운 가능성은 열어주지 못한다. 1947년 블랑쉬는 변수를 기다렸지만, 시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3년 플리백은 자기 세계를 흔드는 변수를 만난다.
플리백에게 가장 잔인한 것은 거절이 아니라 거절당하지 않는 일이다. 플리백은 이미 욕망받을 준비, 소비될 준비, 심지어 거절당할 준비도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게임 자체에 참여하지 않는 인물, 즉 변수가 등장한다. 바로 매일 찾아오는 늙은 남자 ‘존’이다.
존은 처음으로 플리백의 몸이 아니라 그녀 자체, 사람을 바라본 인물이다. 플리백이 가슴을 드러내며 만지라고 할 때, 존이 눈을 가리면서 하는 말, “아가… 옷 올리렴”은 몸이 아닌 마음의 상처를 향한 말이다. 이 순간, 플리백의 세계는 오류가 발생한다. 진정한 따뜻함 앞에서는 더 이상 ‘소비되는 몸’이라는 자기혐오의 처벌 뒤로 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리백은 마지막까지 익숙한 방식으로 관계를 확인하려 한다. 눈을 가린 존에게 자신을 만지라고 오열하는 플리백의 행위는 친밀함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이는 자기 자신이 결국 소비되는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의식이다. 존이 그녀를 욕망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결국 소비되고, 소모되는 몸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던 자기파괴적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를 존이 거부하면서 플리백의 자기처벌에는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다. 이때야말로 플리백은 자기처벌만으로는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순간과 마주한다.
다시 관계의 문턱에서
두 인물은 모두 섹스를 선택했지만, 실패한 것은 섹스가 아니라 관계였다. 사랑도 연결도 사라진 자리에서, 관계를 대신하려 한 몸의 언어인 것이다. 그러나 관계를 갈망할수록 두 인물은 더욱 깊은 고립으로 향한다. 이들이 반복적으로 얻은 것은 욕망이 아니라 상실이었다.
블랑쉬에게 잔인한 것은 관계의 상실보다 타자의 시선이다. 그녀를 가장 깊이 무너뜨린 것은 타인의 시선을 자기 안으로 밀어 넣은 일이다.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한 그녀의 상황,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 시대적 현실은 환상 속으로 퇴각하게 만든다. 현실의 수정이 아니라, 현실 자체 견디지 못한 채 환상으로 그것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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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백의 경우 잔인한 것은 섹스가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위로가 바로 잔인한 현실 직시였다. 그때야말로 플리백은 위로가 필요한 여성이자, 따뜻한 관계 맺음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로 벌거벗는다. 그녀가 쌓아온 엉망인 일상과 망가진 관계로 점철된 세계관이 무너지는 것이다. 가벼운 농담으로 회피하려던 플리백의 시나리오는 몸을 거부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보는 시선에 무너진다.
플리백의 처음과 마지막 공간은 ‘면접장’으로 일관된다. 이때 면접관이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까요?”라는 말에 플리백은 “퍽큐!”(fuck you)라고 응수한다. 플리백의 마지막 말인 ‘퍽큐’는 자기와의 관계가 바뀌는 전환점이자, 더 이상 타인의 평가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이제 그만하겠다’는 자기 고발의 종료인 것이다. 이때야말로 플리백은 처음으로 타인과의 관계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남긴다.
섹스의 실패라는 공통점에서 출발해서, 블랑쉬는 그 실패를 끝까지 실패인 줄 모르고, 플리백은 실패인 줄 알면서도 지속하다가 어느 순간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다. 같은 폐허에서 한 명은 환상 속에 머물렀지만, 한 명은 폐허를 직시하며 걸어 나올 가능성을 남긴다. 환상으로 관계를 대신한 블랑쉬, 자기처벌로 관계를 대신한 플리백. 80년을 사이에 둔 두 여성은 섹스라는 같은 증상을 앓았지만, 서로 다른 예후를 남긴다.
글/ 공연평론가∙연극학 연구자 홍서아
제4회 국립극장 젊은공연예술평론가상 우수상 수상
한양대학교 예술학부 연극학 박사
現 호서대학교 연극트랙 겸임교수
배우를 꿈꾸던 10대, 무대를 흠모했던 20대, 무대를 그리워했던 30대를 거쳐 무대를 기록하는 현재. 가까이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끝까지 따라가는 시선을 갖게 되었다.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사건이 무대 형식과 미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탐구하며,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사이에서 무대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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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플리백>
2026.06.19~2026.09.06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작 피비 윌러 브리지 연출 류수연 번역∙윤색 조민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