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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극 &#8211; 사이:비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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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8211;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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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김소정]]></dc:creator>
		<pubDate>Mon, 17 Aug 2026 10:44:36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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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c%97%86%eb%8a%94%ec%9e%98%eb%aa%bb/">‘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8211;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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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라는 말은 사건을 마무리하는 가장 손쉬운 문장 중 하나가 되었다. 크고 작은 참사가 지나간 자리에는 ‘복합적인 요인’과 ‘관계 부처 간 협의’가 남았고, 책임은 여러 주체 사이로 흩어졌다. 누군가의 잘못을 묻는 일은 언제나 가능해 보였지만, 정작 그 잘못이 정확히 누구에게 귀속되는지를 묻는 순간 답은 희미해졌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생성형 AI의 등장과 함께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무엇을 추천하고 무엇을 학습하는지조차 완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알고리즘이 인간의 일상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AI가 초래한 피해에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 〈없는 잘못〉은 이 질문을 AI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문제로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AI 이전에는 과연 책임을 제대로 규명하고,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물어왔는가.&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연극 &lt;없는 잘못&gt;(2026.07.17.~2026.07.26.,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20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작인 윤주호의 희곡을 같은 해 단막극으로 초연한 뒤 장막극으로 발전시킨 이번 작품에서 AI 추천 피드가 청소년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설정은 표면에 놓인 사건에 가깝다. 작품이 궁극적으로 겨누는 것은 AI라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발생한 뒤에도 책임의 주체를 특정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지 오래된 구조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새로운 가해자라기보다 이미 존재해온 무책임의 구조를 드러내는 장치에 가깝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무엇이 ‘없는’가</strong></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 is-resized"><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700x467.jpg" alt="KakaoTalk 20260722 131925295 01" class="wp-image-4554" style="width:700px;height:auto"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 1"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2048x1365.jpg 2048w" sizes="(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xfe0f;창작집단양산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극은 특정 AI 알고리즘 영상에 노출된 청소년들의 극단적인 죽음이라는, 실제 있을 법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극이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것은 이 사건이 AI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극 중 알고리즘을 개발한 회사의 대표와 정부만이 알고 있었던 진실―극단적인 선택을 한 아이들이 모두 가정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음―은 AI라는 첨단 기술의 스캔들 뒤에 훨씬 오래된 폭력의 구조가 숨어 있었음을 폭로한다. AI는 방아쇠를 당겼을 뿐, 총알을 장전한 것은 다른 무엇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여기서 극이 정교하게 파고드는 것은 ‘누가 잘못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잘못을 규명할 수 있는 구조가 애초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조사관은 스스로도 온전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조사를 진행하고, 회사 개발팀 팀원은 경영진이 이미 문제를 예상했지만 침묵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혼자 뒤집어쓰기 싫다고 말한다. 극은 이들 각자에게 명확한 악의가 있었다고 단죄하지 않으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어 개념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합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책임의 주체 자체가 증발해 버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관련자 전원이 혐의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되는 결말은, 이것이 개인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애초부터 책임을 흩어놓도록 설계된 시스템의 승리임을 냉정하게 짚어낸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제목 ‘없는 잘못’은 그래서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표면적으로는 ‘내 잘못은 없다’라는 각 인물의 항변이지만, 더 깊은 층위에서는 애초에 잘못을 특정할 수 있는 좌표 자체가 이 사회에 없다는 진단이다. 극은 이 부재를 냉소로 흘려보내지 않고, 관객에게 ‘우리 모두 여기에 일조하고 있었음’을 무대 연출을 통해 시각화한다. 일상의 보도블록과 이어진 극장 객석의 문이 열리는 순간, 극이 진행되던 무대에 일상의 시공간이 침투해오며 극의 시·공간과 뒤엉킨다. 이를 통해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배우가 대사를 통해 관객에게 현실을 인지시켰던 것처럼, 〈없는 잘못〉은 미아리고개극장이라는 공간적 특징을 사용해 객석에 앉아 사건을 관망하던 관객마저 책임을 외면해 온 구조의 목격자 자리로 이끈다.</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블랙박스(black box)의 변화와 시각화&nbsp;</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본래 ‘블랙박스’란 내부의 작동 원리를 알 수 없는 채 입력과 출력만을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공학적 용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 오로지 무언가를 넣었을 때 무엇이 나오는지로만 그것을 이해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정반대의 맥락에서도 사용되어 왔다. 항공기 사고 조사에 쓰이는 블랙박스(비행기 기록장치)는 역설적으로 사고의 원인, 즉 ‘누구의, 무엇의 잘못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치다. 이 기록장치는 참사 이후 가장 먼저 수색하는 대상이자 책임 소재를 가리는 유일한 물증이 된다. 자동차에 설치되는 블랙박스(대시캠) 역시 마찬가지다―사고의 과실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늘 무언가를 기록하고 저장해 둔다. 즉 ‘블랙박스’라는 단어는 이해할 수 없는 불투명함과, 불투명함 속에서도 진실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모순적인 기표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700x467.jpg" alt="KakaoTalk 20260722 131925295 06" class="wp-image-4555"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 2"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2048x1365.jpg 2048w" sizes="(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xfe0f;창작집단양산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없는 잘못〉은 이 모순을 정확히 겨냥한다. 극 중 블랙박스는 크게 두 가지의 맥락에서 사용된다. 하나는 AI를 블랙박스에 빗대는 언어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무대큐브(블랙박스)이다. 이때, 후자의 블랙박스는 증식할수록 사건을 규명하는 항공기록장치나 대시캠의 기능과는 정반대로 작동한다. 박스가 늘어갈수록 무대는 오히려 더 불투명해지고, 관객은 저 안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된다. 사건의 진실이 파헤쳐질수록 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짙어지는 이 역설이야말로, 극이 말하고자 하는 우리 시대 책임 구조의 초상이다. 데이터는 쌓이고 알고리즘은 정교해지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 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누구도 설명하지 못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동시에 극은 여기에 또 다른 오랜 별명, 텔레비전의 ‘바보상자’를 겹쳐놓는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박스와, 익숙한 이미지를 반복하여 사고를 대신해 온 바보상자가 겹칠 때, 작품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과거 텔레비전이 전달하는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AI가 내놓는 답변 역시 손쉽게 진실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증식하는 검은 박스(무대 큐브)는 단순한 소품을 넘어, 진실을 확인하는 대신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동시대의 불투명성을 물질화하는 오브제로 기능하게 된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decoding="async"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2-700x467.jpg" alt="KakaoTalk 20260722 131925295 02" class="wp-image-4556"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 3"><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xfe0f;창작집단양산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특히, 극 중후반, 이 박스들이 격자판 형태로 재배치되며 미로 같은 구조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는 조사와 추적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선형적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길을 잃도록 설계된 미로 속에서 헤매는 행위임을 공간적으로 증언한다. 이때 외계인 형상을 한 인물(음모론자)이 들어와 진실에는 관심 없는 언론의 행태를 경고하고, 뒤로는 ‘세상이 왜 이래’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한탄하는 나훈아의 〈테스형!〉이 재생된다. 이 이질적인 캐릭터의 등장은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 사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모호하게 흔들어 놓는다. 이후 계속해서 등장하는 강렬한 〈테스형!〉의 멜로디는 극 중의 대사는 특정한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책임을 분명하게 규명할 수 있는 현실에 한탄의 숨을 내쉬며 대사와 노래를 분리한다. 과연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사일지, 아니면 노래일지 관객에게 질문하면서 말이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콩트가 된 비극, 비극이 된 콩트</strong></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700x467.jpg" alt="KakaoTalk 20260722 131925295" class="wp-image-4557"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 4"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2048x1365.jpg 2048w" sizes="(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xfe0f;창작집단양산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장진웅 연출은 청소년의 죽음과 학대, 언론의 부패, 정경유착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 본 작품을 연출하는 데 있어 콩트적 어조를 선택한다. 기자가 내부고발자인 개발팀 임원을 뒤쫓는 장면이 달리기에서 수영으로, 다시 총싸움을 방불케 하는 과장적인 행동으로 확장되는 방식은 명백히 희극적인 과잉이다. 이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조사관과 기자가 이어서 서로가 진실을 독점하기 위해 주도권 싸움을 하고, 이 과정은 정열의 탱고로 풀어진다. 또한 내부고발자가 조사실에서 서명하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 조사관은 한 편에서 당구를 친다. 누군가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재미나 흥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장진웅은 연속되는 콩트 장면에서 관객이 마음 편하게 웃어도 되는지, 아니면 그것을 보고 불쾌해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든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700x467.jpg" alt="KakaoTalk 20260722 131925295 11" class="wp-image-4558"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 5"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2048x1365.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xfe0f;창작집단양산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한편으로 진중함과 콩트의 병치는 극 중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덮친다. 비극이 곧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가 곧 이윤이 되는 현실의 순환 구조는, 진중함과 콩트의 결합 그 자체가 아닌가? 작금의 현실을 무거운 톤으로만 전달했다면 관객은 익숙한 사회고발극의 구조 안에서 안전하게 슬퍼하고 극장을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웃음과 죄책감이 뒤섞인 불편한 감정 상태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관객은 ‘책임을 진다’라는 것이 과연 이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라는 회의와 마주하게 된다. &nbsp;</p>



<p class="wp-block-paragraph">그래서 막이 내린 뒤에서 &lt;테스형!&gt;의 멜로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무대와 객석, 극장과 일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자리에서 반복되는 이 노래는 책임을 묻는 질문이 끝내 명확한 답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환기한다. 극은 끝까지 책임을 추적하지만, 그 책임을 온전히 귀속시킬 한 사람을 끝내 만들지 않는다. 대신 질문만 남긴다. 우리는 정말 책임자를 찾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책임자가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것인가. 〈없는 잘못〉이 무대 위에서 끝내 보여주는 것은 ‘잘못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잘못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누구의 것으로도 만들 수 없는 세계인지도 모른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details class="wp-block-details is-layout-flow wp-block-details-is-layout-flow"><summary>글/공연∙뮤지컬 평론가 김소정</summary>
<p class="wp-block-paragraph">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공연예술학전공 석사 졸업 및 박사 수료<br>제4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장려상 수상 <br>한국경제 아르떼 「김소정의 무대 밖 뮤지컬」 연재</p>



<p class="wp-block-paragraph">뮤지컬을 중심으로 공연예술 연구와 평론을 하며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공연은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들의 집합체이자 변형이며, 공연 비평은 시리도록 아름답지만 찰나의 순간 사라져가는 것들을 언어로 담아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드라마터그로도 활동하고 있다.</p>
</details>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p class="wp-block-paragraph">&#8211;<br><strong>연극 〈없는 잘못〉</strong><br>2026.07.17~2026.07.26 미아리고개예술극장<br>창작집단 양산박 / 작 윤주호 연출 장진웅 드라마투르그 오판진</p>



<p class="wp-block-paragraph"></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c%97%86%eb%8a%94%ec%9e%98%eb%aa%bb/">‘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8211;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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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활자의 파도 속에서 상실을 건져 올리다 &#8211; 연극 〈감정 연습〉·〈사사로운 사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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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이진]]></dc:creator>
		<pubDate>Sun, 02 Aug 2026 01:52:34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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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연극]]></category>
		<category><![CDATA[연극감정연습]]></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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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 class="wp-block-heading"></h2>



<p class="wp-block-paragraph">창작집단 LAS 연극 &lt;감정 연습&gt;(이경헌 작, 신명민 연출, 2026.5.8~5.17,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 202)은 상실의 고통을 통과해 온 두 남자의 2인극이다. 공공도서관 보존서고에서 진행되는 김여작과 현성주의 비공식 독서동아리 활동은, 폐암 환자 김여작의 생이 막바지에 다다르며 종료된다. 두 사람 모두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사별자다. 김여작은 사고로 떠난 아내의 죽음이 제 탓이라 확신한다. 현성주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 송해원이 왜 죽었는지 몰라 자신의 감정을 여는 문에 자물쇠를 채웠다.</p>



<p class="wp-block-paragraph">그들의 독서 토론은 치유와 위로, 연대와 공감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김여작은 떠난 아내의 이름을 타인처럼 무미건조하게 부르는 현성주의 폐부를 찌르며 그가 감정을 토해내게 만든다. 그건 속내를 드러내는 법을 잊은 현성주를 위한 감정 연습이기도 하지만, 두 아내를 위한 뒤늦은 애도이기도 했다. 죽음의 원인을 머리로만 냉정하게 분석하던 현성주의 뜨거운 눈물도, 안정적인 삶과 양심을 버리고 돈에 미쳐 살던 김여작의 후회도 애도의 일부였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333"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302763_203720_3637-333x500.jpeg" alt="302763 203720 3637" class="wp-image-4347" title="활자의 파도 속에서 상실을 건져 올리다 - 연극 〈감정 연습〉·〈사사로운 사서〉 6"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302763_203720_3637-333x500.jpeg 333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302763_203720_3637-200x300.jpeg 2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302763_203720_3637-150x225.jpe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302763_203720_3637-768x1152.jpe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302763_203720_3637-1024x1536.jpeg 1024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302763_203720_3637.jpeg 1280w" sizes="auto, (max-width: 333px) 100vw, 333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국립극단</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국립극단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이 공동 기획한 연극 &lt;사사로운 사서&gt;(강현주 작·연출, 2026.6.20~6.28,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또한 공공도서관이 주요 배경이다. &lt;감정 연습&gt;의 도서관이 상실의 기억과 죽음의 단서를 모아 재조립하며 애도하는 공간이었다면, &lt;사사로운 사서&gt;의 북부도서관은 빗물에 유실될 뻔한 책들을 꺼내 올려 복원하는 공간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상실의 순간을 간신히 붙잡아 책을 구조하는 사서들의 일상은 얼핏 보면 단조롭다. 물에 젖은 책들을 한 장씩 말리고, 글자들을 복원하고, 자원봉사자들을 인솔하며, 서로 아웅다웅하다가도 옛 기억에 잠긴다. 도서관에서 맞이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순간조차 조용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그들의 일상은 묵묵함과 성실함의 또 다른 이름이다. 물리적 상실을 막아낸 그들은, 마음속에 상실된 채 묻혀 있던 기억·죄책감·꿈을 복원한다.</p>



<p class="wp-block-paragraph">&lt;감정 연습&gt;, &lt;사사로운 사서&gt; 모두 잃어버린 지 오래된 마음과 기억을 활자와 함께 되짚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lt;감정 연습&gt;은 이성과 냉정이란 감옥에 갇힌 슬픔과 애도를 석방하는 과정을, &lt;사사로운 사서&gt;는 보존서고와 빗물에 파묻힌 책들을 꺼내듯 잊힌 순간들도 복원하는 과정을 그려냈다.</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마음이 말라버린 남편, 감정으로 영혼을 해갈(解渴)하다 – 연극 &lt;감정 연습&gt;</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연극 &lt;서재 결혼 시키기&gt; (이경헌 작, 신명민 연출, 2025.12.13~2025.12.21,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연작인 &lt;감정 연습&gt;은 자살 사별자 현성주를 극 중심에 뒀지만, 아내 송해원이 ‘왜’ 죽었는지 이유를 파고들지 않는다. 관객 또한 송해원의 자살 원인을 알 수 없다. 극에서 명확히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성주가 못 본 송해원의 옛 모습을 조금 더 아는 김여작 또한 그녀가 왜 떠났는지 모른다. 즉 작품 속 인물도, 관객도 ‘왜’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생전 송해원이 얼마나 반짝거리고 엉뚱했는지, 말도 없이 떠나버린 아내의 죽음에 현성주가 감당할 슬픔의 무게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만 해볼 뿐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현성주가 알지 못해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이라면, 김여작은 지나치게 잘 알아서 괴로운 사람이다. 김여작은 자기 아내가 왜 세상을 떠났는지 알고, 송해원이 현성주를 사랑한 순간들을 목격했다. 김여작이 발견한 송해원의 ‘사랑’이 현성주를 만나러 가기 전 차에서 고데기로 머리를 세팅하던 사소한 순간일지라도, 그러한 사소함조차 자살 사별자가 된 현성주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아내가 왜 죽었는지 몰라 미쳐버린 남편에게, 아주 작은 ‘앎’은 터지기 직전의 물풍선을 바늘로 찌르는 것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김여작이 인지한 것들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김여작의 앎은 현성주 감정을 채운 자물쇠를 열고, 김여작과 자식들 사이 관계를 변화시키고, 서로 간의 감정 또한 바꾼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예뻐 보이고 싶었던 여자의 행동은 슬픔을 무장한 갑옷을 벗겨낸다. 돈에 양심과 도덕을 팔며 살다 아내를 잃었다는 걸 잘 알아 죄인이 된 폐암 환자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식들에게 손을 내민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25"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4_STD-700x425.jpg" alt="IE003621964 STD" class="wp-image-4348" title="활자의 파도 속에서 상실을 건져 올리다 - 연극 〈감정 연습〉·〈사사로운 사서〉 7"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4_STD-700x425.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4_STD-300x182.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4_STD-150x91.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4_STD-768x466.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4_STD.jpg 1206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창작집단LAS</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김여작의 오지랖 섞인 호의를 ‘감정 연습’이라 받아들인 현성주의 냉소는 건조해도 따뜻한 인류애로 변한다. 곁을 내주지 않던 현성주는 김여작이 좋아하는 믹스커피를 함께 마시고, ‘우리 건조하게 헤어집시다’라는 김여작의 마지막 부탁에 응한다.</p>



<p class="wp-block-paragraph">무지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던 현성주는 전엔 몰랐던 송해원의 한 장면을 알고, 자살 사별자로 꾸역꾸역 살아온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며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책을 읽으며 몰랐던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와도 닮았다.</p>



<p class="wp-block-paragraph">현성주와 김여작은 독서 토론으로 서로의 처지를 관찰하고 상처를 이해했다. 두 사별자의 독서를 통한 애도는 떠나간 아내들뿐만 아니라 자신과 서로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활자와 책은 상실의 고통을 비추는 거울이자 감정의 깨달음이라는 구원이었다.</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빗물에 잠긴 건 삶이었다 – 연극 &lt;사사로운 사서&gt;</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lt;감정 연습&gt;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는 이들을 지켜보는 이의 상실을 다룬다. 반면 &lt;사사로운 사서&gt;는 상실의 순간을 붙드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침수된 책을 꺼내고, 물 먹은 책을 빳빳하게 복원하고, 옛 금서들을 희귀본의 자리에 재배치하고, 지난 기억과 꿈도 빗물에서 꺼내 올린다.</p>



<p class="wp-block-paragraph">도서관의 의미는 저마다 다르다. 인문사회자연과학실 실장 재선에겐 어린 시절 추억과 죄책감을 묻은 곳, 1년 차 사서 시연에겐 사회생활의 시작이자 노력의 증거, 수서 담당 정윤에겐 커리어의 자부심, 정리 담당 대영에겐 옛 친구를 떠올리는 곳, 사회복무요원 창현에겐 잊었던 꿈과 새로운 동료를 만나는 장소가 도서관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상실을 막으려는 이들은 북부도서관에서 일하는 이들뿐만이 아니다. 찾는 이가 없어 보존서고에 갇힌 책이 사라지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대출하는 이용자, 복원을 돕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 백여 명의 자원봉사자들까지. 이들은 대가 없이도 책을 찾고 물에 빠진 책들을 살린다. 이용자와 자원봉사자들에겐 도서관이 돈을 버는 일터가 아니다. 대사를 통해서만 엿볼 수 있는 이들의 마음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순수하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2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2-700x420.jpg" alt="20260626507842" class="wp-image-4349" title="활자의 파도 속에서 상실을 건져 올리다 - 연극 〈감정 연습〉·〈사사로운 사서〉 8"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2-700x420.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2-300x18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2-150x9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2-768x461.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2.jpg 1200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국립극단</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lt;사사로운 사서&gt;의 책은 기억과 공간을 복원하는 공간으로도 기능한다. 실제 도서관을 명동예술극장으로 옮긴 듯한 압도적인 무대에 쌓인 책들은 빗물을 막는 담장이기도 하다. 보존서고에 들어차는 빗물은 종이책으로 대표되는 낡은 것과 오래된 것을 밀어내는 파도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구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을 삶으로 여기는 이들이 구조대를 자처하며 낡은 것, 밀려난 것, 잊힌 것, 사라질 것들을 새로운 물결에서 꺼내 올렸기 때문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lt;사사로운 사서&gt; 또한 &lt;감정 연습&gt;처럼 이들이 ‘왜’ 책과 활자와 인쇄물의 상실을 막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침수 사고를 묵묵하게 버텨내는 이들의 일상을 담담히 묘사할 뿐이다. 도서관 이용자가 줄어도,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대체돼도 사서들은 책과 공간을 정갈하게 보존한다. 보존서고의 책만 골라 주기적으로 대출하는 이용자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일부 자원봉사자들은 자발적으로 밤까지 일하며 책 복원에 힘쓴다. 비효율을 감당하며 책과 활자의 상실을 막아내는 이들의 사명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p>



<p class="wp-block-paragraph">&lt;서재 결혼 시키기&gt;, &lt;감정 연습&gt;의 송해원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알 수 없는 건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유가 지나치게 많기에 원인을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lt;사사로운 사서&gt; 인물들 또한 책과 도서관을 지켜내려는 이유가 각양각색일 것이다. 저마다의 사명감은 당연함이 됐고, 그러한 당연함은 삶이 됐다. 그리하여&nbsp;&lt;사사로운 사서&gt;의 메시지는 보이는 것 그대로 명료하게 정의할 수 있다. 삶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가진 당연한 본능이다. 그래서 그들은 책을 지키고 복원했다.</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무정한 상실을 견디는 방법</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서울국제도서전은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고, 텍스트힙(Text Hip : 독서를 멋지다고 여기는 문화) 열풍은 사그라질 줄 모른다. 그럼에도 성인 독서율은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lt;감정 연습&gt;, &lt;사사로운 사서&gt; 모두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현실 또한 담담히 묘사한다. &lt;감정 연습&gt; 비공식 독서동아리 멤버는 현성주와 김여작 둘 뿐이다. &lt;사사로운 사서&gt;의 북부도서관 또한 이용자가 적고, 보존서고에 갇힌 책들은 수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침수까지 됐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31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3-700x310.jpg" alt="20260626507843" class="wp-image-4350" title="활자의 파도 속에서 상실을 건져 올리다 - 연극 〈감정 연습〉·〈사사로운 사서〉 9"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3-700x310.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3-300x133.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3-150x66.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3-768x340.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0260626507843.jpg 1000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국립극단</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음식은 유통기한이 있고, 종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부식되며 글자도 빛에 바래진다. 오늘날의 책은 sns와 텍스트힙 문화에 편승해 생명력을 겨우 연장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종이책, 활자, 종이를 넘기며 책을 읽는 행위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도서관이나 서점 등 책이 가득한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고요와 위로는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lt;감정 연습&gt;, &lt;사사로운 사서&gt; 모두 도서관 보존서고라는 공간에 대한 애착도 다룬 작품이다. 두 작품에서 보존서고는 단순한 배경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p>



<p class="wp-block-paragraph">&lt;감정 연습&gt;, &lt;사사로운 사서&gt; 모두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쓴 섬세한 대본, 사실적인 무대, 입체적인 캐릭터와 디테일한 대사들로 현실을 실감 나게 구현했다. 그러면서도 활자만이 만드는 낭만도 그려냈다. 인물들은 책을 매개로 만나고, 가까워지고,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되며 서로의 상처를 이해한다.</p>



<p class="wp-block-paragraph">AI와 숏폼과 도파민에게 일상을 점령당한 빠른 시대에 무대에 오른 두 작품은, 예고도 없이 곁을 떠나는 무정하고 애틋한 것들을 다룬다. 시간, 감정, 기억, 사람, 사랑, 인생. 책은 늘 그 자리에 존재하며 천천히 바래지지만, 마음과 사람과 생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그래서 &lt;감정 연습&gt;과 &lt;사사로운 사서&gt;는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밀려오고 떠나는 시대에도, 느린 책이 존재하는 한 인류애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18"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3_STD-700x418.jpg" alt="IE003621963 STD" class="wp-image-4351" title="활자의 파도 속에서 상실을 건져 올리다 - 연극 〈감정 연습〉·〈사사로운 사서〉 10"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3_STD-700x418.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3_STD-300x179.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3_STD-150x9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3_STD-768x459.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IE003621963_STD.jpg 1206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창작집단LAS</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lt;감정 연습&gt;의 김여작은 죽어가면서도 책을 읽었고, 현성주는 영혼이 붕괴한 상태에서도 책과 김여작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마음 일부를 회복했다. &lt;사사로운 사서&gt;의 사서들, 자원봉사자들, 이용자들 또한 책을 살리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았다.</p>



<p class="wp-block-paragraph">책은 혼자 읽는 것이라 착각하기 쉽지만, &lt;감정 연습&gt;과 &lt;사사로운 사서&gt;는 함께 책을 접하는 이들을 내세웠다. 두 작품은 상실로 인해 텅 비어버린 마음의 서고를 채울 수 있는 건 책과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극이 넘쳐나는 시대, 늘 그 자리에 있는 책이 사라지지 않을 이유다.</p>



<p class="wp-block-paragraph"></p>



<details class="wp-block-details is-layout-flow wp-block-details-is-layout-flow"><summary>글/공연예술평론가 이진</summary>
<p class="wp-block-paragraph">제3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장려상 수상<br>서울예대 극작과 졸업<br>문화예술 플랫폼 &lt;아트인사이트&gt; 연극∙뮤지컬 PRESS 기사 연재</p>



<p class="wp-block-paragraph">직장을 다니며 프리랜서 작가 활동을 하던 중, 제3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을 수상하며 공연 평론가로 등단했다. 영상 시나리오, 애니메이션, 소설, 오디오, 드라마, UX 라이팅 등 여러 분야에서 글을 써왔다. 무대는 연약한 존재가 삶에 맞서는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고,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공간이라 믿기에 공연 비평을 쓴다. </p>
</details>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p class="wp-block-paragraph"><strong>—<br>연극 〈감정 연습〉</strong><br>2026.05.08.–05.17.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 202<br>창작집단 LAS<br>작 이경헌 / 연출 신명민</p>



<p class="wp-block-paragraph"><strong>연극 〈사사로운 사서〉</strong><br>2026.06.20.–06.28.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br>국립극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br>작·연출 강현주</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a%b0%90%ec%a0%95%ec%97%b0%ec%8a%b5-%ec%82%ac%ec%82%ac%eb%a1%9c%ec%9a%b4%ec%82%ac%ec%84%9c/">활자의 파도 속에서 상실을 건져 올리다 &#8211; 연극 〈감정 연습〉·〈사사로운 사서〉</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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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올라오스, 그 이름이 묻는 것 – 섬으로간 나비 〈이올라오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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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김소정]]></dc:creator>
		<pubDate>Sun, 26 Jul 2026 23:30:00 +0000</pubDate>
				<category><![CDATA[비평]]></category>
		<category><![CDATA[연극]]></category>
		<category><![CDATA[김소정]]></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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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연극 &#60;이올라오스&#62;(극작 천성진, 연출 박고은)는 테베의 신성부대의 마지막 전투였던 카이로네이아 전쟁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멜라스(김준식), 아가토(신수빈), 피론(정태영)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46;&#46;&#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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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연극 &lt;이올라오스&gt;(극작 천성진, 연출 박고은)는 테베의 신성부대의 마지막 전투였던 카이로네이아 전쟁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멜라스(김준식), 아가토(신수빈), 피론(정태영)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카이로네이아 전투는 테베의 신성부대가 대부분 전멸한 전투로 기록된다. 신성부대는 150쌍, 300명의 남성 연인으로 이루어진 정예 보병대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의 맹세는 헤라클레스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이올라오스의 무덤 앞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작품은 이들의 맹세 장소였던 이올라오스의 무덤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이때 후대에는 헤라클레스와 이올라오스의 관계를 연인으로 해석하는 전승 역시 이어졌고, 이올라오스는 ‘함께 싸우는 자’, ‘끝내 남아 기억하는 자’의 상징이 되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흥미로운 것은 본 작품이 ‘이올라오스’를 제목으로 삼으면서도, 정작 무대 위에 이올라오스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이 단어를 발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올라오스’는 처음부터 부재한다. 그리고 그 부재한 자리를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피론에게 이어진다. ‘증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피론의 기도’는 단순한 엔딩의 여운이 아니다. 이는 제목이 처음부터 예비해 둔 결말이다. 살아남아 기억하는 자, 죽음 이를 대신해 증언하는 자. 이 극은 처음부터 이올라오스라는 자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세 인물의 이름 역시 이러한 구조를 미리 암시한다. 멜라스는 그리스어 μέλας(mělas)로 ‘검다’, ‘어둡다’를 뜻하고, 아가토는 ‘좋음’, ‘선함’을 의미하는 ‘아가토스(ἀγαθός, agathǒs)’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피론은 불을 뜻하는 ‘퓌르(πῦρ, pür)’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문자 그대로 불꽃을 품은 존재다. 어둠과 선함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 그러나 불은 어느 한쪽의 편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을 밝히기도 하고, 선마저 태워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극은 세 인물의 이름만으로도 권력과 윤리, 그리고 변화의 삼각구도를 이미 설계해 두고 있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연대와 사랑 사이에서</strong></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700x467.jpg" alt="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 class="wp-image-4324" title="이올라오스, 그 이름이 묻는 것 – 섬으로간 나비 〈이올라오스〉 11"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2048x1366.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섬으로 간 나비</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연대’는 보통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자주 호출되어 왔다. 이 작품을 단순히 연대의 서사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아가토와 멜라스의 과거, 그리고 아가토와 피론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는 끔찍한 전쟁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아픔을 나누며 기대고, 위로받고 싶었던 감정에 기반한 전쟁의 참사 속에 피어난 사랑이자 동시에 군인들의 연대로 읽히기도 한다.</p>



<p class="wp-block-paragraph">고대 그리스에서 시민은 오직 남성이었고, 여성과 노예, 이방인은 공동체의 바깥에 놓여 있었다. 신성부대는 바로 그 협소한 시민 공동체 안에서 탄생한 군대였다. 그들에게 전쟁은 국가를 위해 추상적 명분을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곁에 선 자신의 연인을 지키는 일이었다. 사랑은 전쟁의 부수적인 감정이 아니라 전투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직접적인 동기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성부대의 사랑은 단순한 로맨스로 환원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연대이기도 한 것이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strong></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700x467.jpg" alt="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 class="wp-image-4326" title="이올라오스, 그 이름이 묻는 것 – 섬으로간 나비 〈이올라오스〉 12"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2048x1366.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섬으로 간 나비</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사람들에게 전쟁 영웅이라 칭송받는 멜라스는 전쟁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순수한 청년 피론까지 유흥 거리로 소비하기에 이른다. 이런 그의 모습에 아가토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멜라스와 아가토는 연인 사이이지만, 멜라스가 그를 대하는 태도는 실질적으로 권력과 위계가 지배하는 관계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가토는 점점 답답함을 느끼고, 그의 세계에 피론이 우발적으로 들어온다. 오래전부터 아가토를 존경해 왔음을 고백하는 피론 앞에서, 아가토는 비로소 숨을 내쉰다. 멜라스의 통제 아래 있던 아가토가 피론이라는 불꽃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다. 어둠(멜라스)에 있던 선(아가토)이 불꽃을 통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스스로를 계속 정화하는 모습에서 세 인물의 의미가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멜라스가 아가토에게 행사했던 억압도, 종국에 아가토가 피론을 전장에서 탈출시키는 선택도 표면적으로는 모두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는 상대를 자신의 곁에 붙들어두려는 소유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는 사랑이다. 극은 이 둘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사랑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쉽게 통제의 언어로 억압의 족쇄이자 정당성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환기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서로 다른 두 형태의 사랑은 결국 멜라스와 아가토 각자의 죽음으로 완결된다. 아가토는 오래전부터 전쟁에서 벗어나기를 꿈꿨다. 멜라스 역시 한때 함께 떠나자고 말했지만 끝내 실행하지 않는다. 결국 아가토는 자신은 맹세로 인하여 벗어날 수 없는 전장에서 피론만을 떠나보낸 채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 앞에 멜라스는 그를 향한 뒤틀린 감정을 쏟아내며 적의 칼에 숨을 거둔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전쟁에 집착하던 멜라스의 숨은 끊어지고, 전투가 끝난 후 유일하게 숨을 쉬고 있는 인물은 피론 뿐이다. 아가토와 숨결을 나눴던 피론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됨으로써 피론은 아가토의 숨을 자양분으로 살아남아 그 숨을 이어 나간다. 극은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피론의 신분에 근거한다. 천민인 그는 처음부터 신성부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만큼 맹세와 명예의 체계 바깥에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다른 군인들과 달리 도망칠 수 있었다. 신성부대 안에 있었지만, 온전히 속해 있지 않았기에 피론은 그 체계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이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700x467.jpg" alt="피론윤여백" class="wp-image-4325" title="이올라오스, 그 이름이 묻는 것 – 섬으로간 나비 〈이올라오스〉 13"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2048x1366.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섬으로 간 나비</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멜라스와 아가토는 서로 다른 신념을 품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맹세와 명예라는 동일한 질서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사랑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끝내 자신을 구속한 질서를 넘어설 수 없었던 삶의 구속구이기도 하다. 반면 피론은 맹세하지 않았기에 살았다. 그러나 그의 생존은 보상이 아니다. 이는 새로운 의무의 시작이다. 그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기 때문에 증언해야 한다. 이 순간 피론은 더 이상 한 명의 병사가 아니다. 부재했던 이올라오스의 자리를 이어받은 존재가 된다. 이에 처음 신에게 기도하며 등장했던 아가토의 자리를 이어받아 그 자리에 피론이 서게 된다. 이 결말을 통해 연극 &lt;이올라오스&gt;는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왜 지금 신성부대인가</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389"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700x389.png" alt="스크린샷 2026 07 27 오전 2.34.04" class="wp-image-4327" title="이올라오스, 그 이름이 묻는 것 – 섬으로간 나비 〈이올라오스〉 14"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700x389.pn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300x167.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150x83.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768x427.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1536x854.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2048x1139.pn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김소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본 공연이 2300년 전 테베의 신성부대를 다시 불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와 안보, 명분이라는 거대한 언어가 희생을 정당화해 온 세월 속, 이 극은 전쟁의 동력을 국가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도 되돌린다. 신성부대의 역설은 가장 사적인 사랑이 가장 강한 공적 결속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때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이 아니다. 작품은 한때 효율적인 전략처럼 보였던 사랑을 기반으로 한 군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극단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통제로 변하고, 도구가 되며, 혹은 반대로 누군가를 해방하는 힘이 되는지를 추적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다만 이러한 구조가 온전히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바로 아가토와 멜라스 간 사랑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극은 두 사람의 사랑과 죽음에 대해서는 보여주지만, 그 사랑이 형성되어온 시간은 거의 비워둔다. 무엇이 두 사람을 서로에게 이끌게 했는지, 왜 하필 이 둘이어야 했는지가 끝내 충분히 제시되지 않는다. 관계의 균열은 선명할수록, 균열 이전의 결속 역시 선명해야 한다. 사랑의 시작이 비어 있을 때, 사랑의 끝 역시 다소 성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p>



<details class="wp-block-details is-layout-flow wp-block-details-is-layout-flow"><summary>글/공연∙뮤지컬 평론가 김소정</summary>
<p class="wp-block-paragraph">제4회 국립극장 젊은공연예술평론가상 장려상 수상<br>서울대학교 공연예술학전공 석사 졸업 및 박사 수료</p>



<p class="wp-block-paragraph">뮤지컬을 중심으로 공연예술 연구와 평론을 하고 있다. 한국경제 &lt;아르떼&gt;에 &#8216;김소정의 무대 밖 뮤지컬&#8217;을 연재하고 있으며, 이외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최근 드라마터그로도 활동하고 있다.</p>
</details>



<p class="wp-block-paragraph"></p>



<p class="wp-block-paragraph">&#8211;<br><strong>연극 〈이올라오스〉</strong><br>2026.06.21.-09.06. 예스24아트원 3관<br><strong>제작</strong> (주)섬으로간나비 / <strong>작</strong> 천성진 / <strong>연출</strong> 박고은</p>



<div class="mzb-button mzb-button-4df3b8bb "><a class="mzb-button-link is-medium is-style-filled" href="https://ticket.yes24.com/Perf/58448" target="_blank" rel="noopener">예매하기</a></div>



<p class="wp-block-paragra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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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8211; 브러쉬씨어터 〈플리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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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홍서아]]></dc:creator>
		<pubDate>Wed, 08 Jul 2026 10:51:54 +0000</pubDate>
				<category><![CDATA[비평]]></category>
		<category><![CDATA[연극]]></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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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홍서아]]></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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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블랑쉬와 플리백: 80년을 건너 만난 이란성 쌍둥이 1947년 미국. 한 여자가 뉴올리언스에 도착해서 이런 대사를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46;&#46;&#46;</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d%94%8c%eb%a6%ac%eb%b0%b1/">[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8211; 브러쉬씨어터 〈플리백〉</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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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5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700x457.png" alt="dfdf" class="wp-image-4277" title="[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 브러쉬씨어터 〈플리백〉 15"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700x457.pn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300x196.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150x98.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768x502.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1536x1003.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2048x1338.pn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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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 class="wp-block-heading"><strong>블랑쉬와 플리백: 80년을 건너 만난 이란성 쌍둥이</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1947년 미국. 한 여자가 뉴올리언스에 도착해서 이런 대사를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공동묘지행 전차로 갈아탄 뒤, 여섯 블록을 더 가서 엘리시안 필즈에서 내리라고 했어요”.&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욕망’이라는 전차는 공동묘지를 거쳐 엘리시안 필즈에 도착한다. 그러나 낙원을 뜻하는 그 지명은 블랑쉬에게 구원이 아니라 정신적 붕괴의 종착역이 된다. 2013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이 비슷한 결을 지닌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피비 월러-브리지(Phoebe Waller-Bridge)의 &lt;플리백&gt;(Fleabag)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블랑쉬도 플리백도 도착한 곳은 모두 관계의 폐허다. 두 인물에게 섹스는 각각 ‘사랑받고 싶다’와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의 도착점이다. 블랑쉬는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줄 것이라는 환상 속에 살고, 플리백은 자신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살아간다. 블랑쉬는 자신의 붕괴를 환상으로 덮고, 플리백은 알면서도 자기파괴의 행위를 반복한다. 타인의 시선 속에 사는 블랑쉬와 타인의 시선은 알지만 계속 부수는 플리백. 모르면서 혹은 알면서 하는 자기파괴와 혐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두 인물에게 섹스는 욕망이 아니라 증상이다. 그것은 관계를 상실한 몸이 관계를 대신하기 위해 선택한 자기파괴의 방식이다. 80년이라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은 관계의 상실을 몸으로 견디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비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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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 class="wp-block-heading"><strong>보이는 몸과 소모되는 몸: 도덕과 윤리의 경계</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우선 분명히 할 것이 있다. &lt;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gt;와 &lt;플리백&gt;에서는 섹스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섹스’는 관계를 탐하는 인물의 방식으로 제시된다. 블랑쉬와 플리백 모두 관계를 욕망해서 침대에 오르지만, 끝내 도착하지 못하는 곳은 바로 ‘관계’다. 즉 두 인물 모두 실패한 것은 섹스가 아니라 관계인 것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블랑쉬는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요조숙녀’로 연출한다. 그녀는 늙음을 어두운 조명으로, 화려한 옷과 향수로 포장한다. 나이가 적건, 많건 어느 남성에게도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블랑쉬. 그녀는 처음 만난 날에도 제부인 스탠리에게 샤워 후, 드레스 지퍼를 올려달라고 하며 여성성을 드러낸다. 게다가 고향인 벨 레브에서 교사로 지낼 당시 17세 학생과 관계를 갖는 등 도덕적 경계를 넘는다. 블랑쉬에게 결점은 미성년자 성 착취에서 타인과 자신을 파괴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이것이 사랑받기 위해 블랑쉬가 선택한 도덕적 파열이자 비극적 결점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의 이유가 남편 앨런의 동성애와 자살이었다고 해도 말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플리백은 모두 성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 관계들은 친밀함보다 공허를 잊기 위한 반복 행위에 가깝다. 그녀는 타인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보다, 자신을 자발적으로 내어주는 관계 속으로 반복해서 들어간다. 성도착적 페티시를 강요하는 전 남자친구, 하룻밤 상대로 항문 섹스를 유도하는 남성, 가슴을 만진 형부까지 플리백이 만나는 남성들 대부분은 그녀를 온전한 인격보다 성적 대상으로 소비한다. 남성들은 관계를 약속하거나 지속하지 않고, 플리백 역시 관계를 지속할 힘을 잃은 채 섹스와 자위를 반복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사실 도덕적으로 플리백의 선택은 결점이 없다. 자기파괴가 범죄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녀는 타인을 파괴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소모한다. 이 지점에서 플리백은 윤리적 경계를 넘는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윤리적 선택에서 플리백은 자기혐오에서 비롯한 자기소모의 결점을 가지기 때문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처럼 두 인물은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만, 몸을 사용하는 방식은 다르다. 두 인물 모두 관계를 갈망하지만, 블랑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랑을 구하고, 플리백은 자기 자신을 소모하며 연결을 구한다. 블랑쉬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섹스를 반복하고, 플리백은 자기혐오를 견디기 위해 섹스를 반복한다. 즉 블랑쉬는 ‘보이는 몸’을 만들고, 플리백은 ‘소모되는 몸’을 만든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 지점에서 두 인물의 차이가 드러난다. 블랑쉬가 넘는 것은 사회가 정한 도덕의 경계다. 미성년자와의 관계, 교사로서의 책임, 당대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한 그녀의 선택은 사회적 심판의 대상이 된다.반면 플리백이 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윤리의 경계다. 자기존중이 없는 관계, 자기혐오, 자기기만은 법으로 처벌되지 않지만, 스스로를 끊임없이 파괴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따라서 블랑쉬에게 던질 질문은 ‘타인에게 무엇을 했는가’이고, 플리백에게 던질 질문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블랑쉬의 비극이 사회적 도덕의 심판에서 비롯된다면, 플리백의 비극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무너진 윤리의 문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는 몸은 사회의 도덕적 시선 앞에 놓이고, 소모되는 몸은 자기 자신의 윤리적 시선 앞에 놓인다.&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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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 class="wp-block-heading"><strong>관계 상실의 장: 처벌자와 징벌방</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두 작품의 주된 공간인 스텔라의 집과 부의 카페는 소유의 장이 아니라 관계의 장이다. 블랑쉬도 플리백도 끝내 공간 안에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 관계가 무너질 때 공간 역시 함께 상실한다. 다만 블랑쉬는 타인에 의해 축출되고, 플리백은 스스로 떠나지 못한 끝에 공간을 잃는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벨 레브를 잃은 블랑쉬는 플라밍고 호텔에서 관계의 상실을 일시적 성관계로 메우려 했다. 플라밍고 호텔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관계의 상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장소다. 그러나 그 경험은 현실을 회복하기보다 환상이 현실을 대신할 수 없음을 거듭 확인하게 만든다. 이후 블랑쉬가 도착한 스텔라의 집은 그 상실을 되돌려 보려는 마지막 시도가 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스텔라의 집 역시 블랑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집의 실질적 주인인 스탠리는 블랑쉬의 과거 잘못을 심판하고, 폭로한다. 게다가 스탠리는 스텔라가 출산하는 날, 이 집에서 블랑쉬를 강간한다. 스탠리가 블랑쉬에게 가하는 성적 폭력은 그녀의 태도에 근거한 당연함이 아니라 그만큼 가혹하고 잔인한 사회적 폭력이기도 한 것이다. 더불어 이 장면은 블랑쉬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결정적 순간이자 현실의 붕괴가 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 집에서 스탠리는 블랑쉬에게 가부장적 도덕 질서를 집행하는 처벌자이자 사회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의 대리인으로 존재한다. 블랑쉬는 다시 찾은 삶의 공간에서 축출되고, 끝내 정신병원이라는 감시와 수용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블랑쉬의 이동은 사회적 시선이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결국 감시와 수용의 공간만이 그녀를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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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45"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700x445.png" alt="image" class="wp-image-4278" title="[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 브러쉬씨어터 〈플리백〉 16"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700x445.pn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300x191.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150x95.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768x488.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1536x976.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2048x1302.pn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홍서아</figcaption></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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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이에 비해 플리백의 집은 사적 공간이자 은밀한 처벌 공간이다. 혼자 자위하고, 술 마시고, 남성들에게 소비당하는 사적 징벌방이자 독방이다. 공적 공간인 카페는 절친한 친구인 ‘부(Boo)’와 함께 한 공간이었지만, 부가 죽은 후 카페는 속죄의 공간이 된다. 애착이 없는 기니피그 힐러리가 있고, 손님에게 즉석식품을 데워 제공하는 등 실질적으로 운영할 이유가 없는 파산 직전의 카페. 즉 일상적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속죄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플리백은 이 공간에 매일 출근하면서 기니피그 힐러리를 돌보며 부에게 저지른 자신의 죄를 곱씹는 의식을 되풀이한다. 카페를 떠나는 것은 부를 떠나는 일이며, 죄책감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플리백은 파산 직전의 카페를 끝내 떠나지 못한다. 카페는 생계의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과한 징벌방이기 때문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 징벌방에서 플리백은 자기 자신을 훨씬 냉정하게 인식한다. 그녀의 자기 인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기니피그 힐러리의 죽음이다. 지하철 남자가 힐러리를 두세 차례 걷어차고 떠난 뒤에도 플리백은 곧바로 힐러리를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또다시 자기처벌의 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고통에 이빨을 부딪치는 힐러리를 제 손으로 압사시키며 오열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힐러리는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니다. 작고 연약하며, 돌봄이 필요하지만, 타인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 존재다. 더불어 힐러리는 상처와 죄책감을 비추는 플리백의 또 다른 자아로 읽힌다. 고통에 떠는 힐러리를 끝내 안아 죽이는 플리백의 행위는 타인을 향한 폭력이라기보다, 끝나지 않는 고통을 멈추고 싶은 자기 자신을 향한 처벌의 전위가 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 장면은 존을 만나기 전, 자기처벌이라는 방식이 이미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계기다. 부의 카페에서, 부의 반려동물을 제 손으로 죽이는 순간, 플리백은 자기처벌이라는 방식이 끝내 아무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마주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결국 블랑쉬는 사회가 만든 처벌의 공간으로 추방되고, 플리백은 스스로 만든 징벌방마저 끝내 잃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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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395"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700x395.png" alt="s" class="wp-image-4279" title="[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 브러쉬씨어터 〈플리백〉 17"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700x395.pn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300x169.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150x85.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768x433.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1536x866.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320x180.png 32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520x293.png 52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800x450.png 8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1000x563.png 10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png 1992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홍서아</figcaption></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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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 class="wp-block-heading"><strong>현실의 붕괴와 자기처벌의 균열: 변수의 등장</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블랑쉬에게 마지막 보루였던 스텔라의 집, 그 집에서 만난 미치는 그녀에게 희망의 변수였다. 블랑쉬는 미치의 선택을 기다리며 구원을 바랐지만, 그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미치 역시 가부장적 도덕과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미치의 거절 이후, 블랑쉬의 세계를 결정적으로 뒤흔드는 변수는 스탠리이다. 스탠리의 성폭력은 그녀의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계기가 아니라, 끝내 환상을 붕괴시키는 사건으로 작동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그래서 블랑쉬의 인생에 희망이라는 변수는 없다. 결국 그녀는 “나는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존해왔어요”라며 의사의 손을 잡고 떠난다. 그녀는 정신병원 의사의 친절마저 환상 속으로 흡수한다. 이처럼 블랑쉬는 끝까지 타인의 친절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 믿는다. 미치에게는 사랑을, 낯선 의사에게는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블랑쉬가 만나는 모든 타인은 기존의 질서를 반복하거나 수행할 뿐, 그녀의 세계를 바꾸는 변수는 되지 못한다. 심지어 스탠리는 그녀의 환상을 무너뜨릴 뿐 새로운 가능성은 열어주지 못한다. 1947년 블랑쉬는 변수를 기다렸지만, 시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3년 플리백은 자기 세계를 흔드는 변수를 만난다.</p>



<p class="wp-block-paragraph">플리백에게 가장 잔인한 것은 거절이 아니라 거절당하지 않는 일이다. 플리백은 이미 욕망받을 준비, 소비될 준비, 심지어 거절당할 준비도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게임 자체에 참여하지 않는 인물, 즉 변수가 등장한다. 바로 매일 찾아오는 늙은 남자 ‘존’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존은 처음으로 플리백의 몸이 아니라 그녀 자체, 사람을 바라본 인물이다. 플리백이 가슴을 드러내며 만지라고 할 때, 존이 눈을 가리면서 하는 말, “아가… 옷 올리렴”은 몸이 아닌 마음의 상처를 향한 말이다. 이 순간, 플리백의 세계는 오류가 발생한다. 진정한 따뜻함 앞에서는 더 이상 ‘소비되는 몸’이라는 자기혐오의 처벌 뒤로 숨을 수 없기 때문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리백은 마지막까지 익숙한 방식으로 관계를 확인하려 한다. 눈을 가린 존에게 자신을 만지라고 오열하는 플리백의 행위는 친밀함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이는 자기 자신이 결국 소비되는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의식이다. 존이 그녀를 욕망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결국 소비되고, 소모되는 몸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던 자기파괴적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를 존이 거부하면서 플리백의 자기처벌에는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다. 이때야말로 플리백은 자기처벌만으로는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순간과 마주한다.&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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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 class="wp-block-heading"><strong>다시 관계의 문턱에서</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두 인물은 모두 섹스를 선택했지만, 실패한 것은 섹스가 아니라 관계였다. 사랑도 연결도 사라진 자리에서, 관계를 대신하려 한 몸의 언어인 것이다. 그러나 관계를 갈망할수록 두 인물은 더욱 깊은 고립으로 향한다. 이들이 반복적으로 얻은 것은 욕망이 아니라 상실이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블랑쉬에게 잔인한 것은 관계의 상실보다 타자의 시선이다. 그녀를 가장 깊이 무너뜨린 것은 타인의 시선을 자기 안으로 밀어 넣은 일이다.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한 그녀의 상황,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 시대적 현실은 환상 속으로 퇴각하게 만든다. 현실의 수정이 아니라, 현실 자체 견디지 못한 채 환상으로 그것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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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 is-resized"><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598"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598x500.png" alt="a" class="wp-image-4280" style="width:598px;height:auto" title="[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 브러쉬씨어터 〈플리백〉 18"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598x500.png 59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300x251.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150x125.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768x643.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1536x1285.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2048x1713.png 2048w" sizes="auto, (max-width: 598px) 100vw, 598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홍서아</figcaption></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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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플리백의 경우 잔인한 것은 섹스가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위로가 바로 잔인한 현실 직시였다. 그때야말로 플리백은 위로가 필요한 여성이자, 따뜻한 관계 맺음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로 벌거벗는다. 그녀가 쌓아온 엉망인 일상과 망가진 관계로 점철된 세계관이 무너지는 것이다. 가벼운 농담으로 회피하려던 플리백의 시나리오는 몸을 거부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보는 시선에 무너진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플리백의 처음과 마지막 공간은 ‘면접장’으로 일관된다. 이때 면접관이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까요?”라는 말에 플리백은 “퍽큐!”(fuck you)라고 응수한다. 플리백의 마지막 말인 ‘퍽큐’는 자기와의 관계가 바뀌는 전환점이자, 더 이상 타인의 평가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이제 그만하겠다’는 자기 고발의 종료인 것이다. 이때야말로 플리백은 처음으로 타인과의 관계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남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섹스의 실패라는 공통점에서 출발해서, 블랑쉬는 그 실패를 끝까지 실패인 줄 모르고, 플리백은 실패인 줄 알면서도 지속하다가 어느 순간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다. 같은 폐허에서 한 명은 환상 속에 머물렀지만, 한 명은 폐허를 직시하며 걸어 나올 가능성을 남긴다. 환상으로 관계를 대신한 블랑쉬, 자기처벌로 관계를 대신한 플리백. 80년을 사이에 둔 두 여성은 섹스라는 같은 증상을 앓았지만, 서로 다른 예후를 남긴다.&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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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wp-block-columns is-layout-flex wp-container-core-columns-is-layout-8f761849 wp-block-columns-is-layout-flex">
<div class="wp-block-column is-layout-flow wp-block-column-is-layout-flow" style="flex-basis:100%">
<details class="wp-block-details is-layout-flow wp-block-details-is-layout-flow"><summary>글/ 공연평론가∙연극학 연구자 홍서아<br></summary>
<p class="wp-block-paragraph">제4회 국립극장 젊은공연예술평론가상 우수상 수상 <br>한양대학교 예술학부 연극학 박사<br>現 호서대학교 연극트랙 겸임교수</p>



<p class="wp-block-paragraph">배우를 꿈꾸던 10대, 무대를 흠모했던 20대, 무대를 그리워했던 30대를 거쳐 무대를 기록하는 현재. 가까이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끝까지 따라가는 시선을 갖게 되었다.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사건이 무대 형식과 미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탐구하며,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사이에서 무대를 읽는다. </p>
</deta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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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8211;<br>연극 &lt;플리백&gt;<br>2026.06.19~2026.09.06<br>두산아트센터 연강홀<br>작 피비 윌러 브리지 연출 류수연 번역∙윤색 조민형<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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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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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경계의 형식, 질문을 닫는 설명 &#8211; 두산인문극장 〈모어 라이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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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박효경]]></dc:creator>
		<pubDate>Tue, 07 Jul 2026 04:27:51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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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1. 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는 극 행동에 참여하여 사건의 구성을 돕는 한편, 관객이 무대 위 사건과 거리를 두고 성찰하게 하는 장치로&#46;&#46;&#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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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 class="wp-block-heading">1.</h3>



<p class="wp-block-paragraph">그리스 비극에서 코러스는 극 행동에 참여하여 사건의 구성을 돕는 한편, 관객이 무대 위 사건과 거리를 두고 성찰하게 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이 이중의 기능은 프로스케니온(무대)과 테아트론(객석) 사이, 코러스의 독특한 위치에서 비롯되었다. 이 임계적 공간에서 배우도 관객도 아닌 코러스는 극의 안과 밖을 동시에 점유했다. 무대와 객석의 엄격한 분리를 전제하는 근대극이 등장하면서,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이 존재는 설 자리를 잃었다. 코러스는 그 원동력이었던 특수한 위치로 인해 오히려 무대에서 추방된 것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그렇게 퇴장하는 듯했던 코러스가 부활했다. 포스트드라마에 비켜주었던 문학성의 자리를 회복하려는 흐름, 중앙 원근법을 깨고 다중 관점을 확보하려는 동시대 연극의 지향이 죽어가던 형식을 다시 불러냈다.&nbsp;<em>The Death of Tragedy</em>&nbsp;(1961)에서 문학 비평가 조지 스타이너(George Steiner)는 코러스를 “비할 데 없이 유연한 장치”로 설명한 바 있다. 연극 비평가 디르크 필츠(Dirk Pilz)가 거듭 인용한 표현에 기대자면, 비극이라는 형식의 죽음을 선언한 스타이너의 관점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그 안에서 태어난 코러스만은 살아남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연극에 신선한 자극과 혁신의 동력을 공급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94"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976-700x494.jpg" alt="KakaoTalk 20260706 204146976" class="wp-image-4257" title="경계의 형식, 질문을 닫는 설명 - 두산인문극장 〈모어 라이프〉 19"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976-700x494.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976-300x212.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976-150x106.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976-768x54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976-1536x108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976.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연극 〈모어 라이프〉(로런 무니・제임스 예이트먼 작, 민새롬 연출, 2026.4.29~5.17, 두산아트센터 Space111)의 무대는 이 계보에 있다.&nbsp;무대에 놓인 하얀 원형의 단상은 고대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중앙에 올렸던 제단인 티멜레를 연상시킨다. 막이 오르면 각자 마이크를 손에 쥔 여섯 배우가 이 단상을 에워싸고 서서 사건의 배경을 서술한다. 마이크는 인물과 코러스 사이를 오가는 이들의 유연한 위치를 시각과 청각으로 전달하는 장치다. 여섯 배우는 극 중 인물이 되었다가 다시 코러스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그 경계의 자리를 지킨다.&nbsp;화이트큐브를 닮은 간결한 무대는 배우와 그 몸만을 조명한다. 죽어가던 형식을 다시 불러온 선택이 이 작품에서 필연으로 읽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2.</h3>



<p class="wp-block-paragraph">브리짓 역의 이진경은〈모어 라이프〉의 형식적 실험에 단단한 설득력을 불어넣는다. 길을 건너던 중 자율주행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브리짓은 50년이 지난 2073년, 첨단 기술을 통해 인공 신체에 뇌의 데이터를 업로딩한 실험체로 깨어난다.&nbsp;신체는 소멸했으나 인간의 감각과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포스트휴먼의 딜레마를 이진경은 정교한 몸짓으로 구현한다. 전원이 켜질 때마다 코러스의 목소리에 입을 맞추어 조금씩 달라지는 그의 움직임은 기계의 뻣뻣함을 입은 인체의 기묘하고 선득한 감각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nbsp;반복된 실험 끝에 탄생한 브리짓이 남편 해리(이윤재 분)와 나누었던 기억, 해리의 현재 파트너 다비나(이주영 분)가 가꾼 정원의 아름다움, 커피 향의 감각을 복원해 내는 순간, 인공의 표면 아래 드러나는 미세한 호흡 변화와 흔들리는 눈빛은 이 경계의 존재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 묻는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666"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8141-666x500.jpg" alt="KakaoTalk 20260706 204148141" class="wp-image-4258" title="경계의 형식, 질문을 닫는 설명 - 두산인문극장 〈모어 라이프〉 20"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8141-666x500.jpg 66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8141-300x225.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8141-150x113.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8141.jpg 750w" sizes="auto, (max-width: 666px) 100vw, 666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죽은 몸에서 추출한 뇌 데이터, 그 데이터가 이식된 인공 신체,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고 가정되는 정체성이라 불리는 것. 낡은 판자를 하나씩 갈아 끼우다 결국 모조리 새 판자로 갈아 끼운 배가 여전히 같은 배인지 묻는 오랜 철학적 역설이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정체성이 물리적 실체, 즉 신체에서 온다고 본다면 2073년의 브리짓은 50년 전의 브리짓과 분명 다른 존재다. 그러나 존 로크(John Locke) 이래로 인격 동일성 논의가 씨름해 온 또 다른 축, 정체성이 의식과 기억의 연속성에서 비롯된다고 본다면 지금의 브리짓은 여전히 그때의 브리짓이다. 그러나 브리짓의 몸은 어떤 답도 하지 않은 채 무대 위에 서 있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94"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750-700x494.jpg" alt="KakaoTalk 20260706 204146750" class="wp-image-4260" title="경계의 형식, 질문을 닫는 설명 - 두산인문극장 〈모어 라이프〉 21"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750-700x494.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750-300x212.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750-150x106.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750-768x54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750-1536x108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6750.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figcaption></figure>
</div>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3.</h3>



<p class="wp-block-paragraph">〈모어 라이프〉의 무대 연출은 디지털화된 인공 신체와 인간적 의식의 충돌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한다. 굳이 미래를 가리키지 않는 무대는 군더더기가 없고 스크린이 내뿜는 차가운 광원만이 낯선 공간을 밝힌다. 배우의 유기적 신체와 무대의 무기질적 감각이 병존하며 발생하는 긴장감은 그 자체로 첨단 기술 사회에서 명명되지 못한 존재들의 당혹감을 감각하게 한다. 그러나 빛은 언제나 무대 위 배우의 몸에 와서 부딪히고 그것을 통과해야만 관객에게 도달한다. 신체 없는 의식이라는 데카르트적 전제는 의식이 결국 몸을 거치지 않고는 드러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연극의 본질은 그 자체로 데카르트적 오만에 대한 반박이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666"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7963-666x500.jpg" alt="KakaoTalk 20260706 204147963" class="wp-image-4261" title="경계의 형식, 질문을 닫는 설명 - 두산인문극장 〈모어 라이프〉 22"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7963-666x500.jpg 66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7963-300x225.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7963-150x113.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7963.jpg 750w" sizes="auto, (max-width: 666px) 100vw, 666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아쉬운 부분은 이 탁월한 형식적 선택을 온전히 품지 못하는 지점에 있다. 〈모어 라이프〉의 코러스는 이따금 과도한 설명으로 무대와 연기가 구축한 모호함을 지우고 열린 질문을 닫는다. 이러한 친절이 극대화되는 장면은 연구실에서 탈출하려는 브리짓과 이를 막아서는 빅터(김용준 분)가 충돌하는 1막의 절정이다. 연구 책임자의 이름이 빅터로 불린 순간 메리 셸리의 그림자는 이미 무대 전반에 짙게 깔린다. 그럼에도 갈등이 팽팽하게 고조된 이 순간에 다시 등장한 코러스는 『프랑켄슈타인』을 인용하고 제목까지 일러준다. 연출과 배우의 정동을 통해 관객이 스스로 메워야 할 공백을 지나치게 친절한 코러스가 먼저 채워버린다.</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4.</h3>



<p class="wp-block-paragraph">2막의 말미, 전원 버튼을 손에 쥔 브리짓은 삶을 지속하기로 선택한다. 이후 브리짓의 여정 역시 코러스의 서술로 일축된다. 극 전반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 설명 충동은 공교롭게도 삶에서 불확실성과 고통을 제거하겠다는 기술 자본의 약속과 닮았다. 〈모어 라이프〉는 경계의 자리를 택하고도 그 자리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불확실함까지는 미처 끌어안지 못했다. 판자가 모두 교체된 테세우스의 배가 스스로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임을 구태여 선언할 때, 그 확신은 도리어 힘을 잃고 만다.</p>



<p class="wp-block-paragraph">그러나 아쉬움으로만 끝내기에 이 증상은 꽤 징후적이다. 더 많은 삶을 막는 고통과 노화, 죽음을 기술로 지우려는 시도는 언제나 인류가 좇는 욕망이며, 여백을 자꾸 채우려는〈모어 라이프〉의 코러스는 그 욕망의 언어적 변형이다. 무의식중에 형식이 주제를 앓았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666"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8331-666x500.jpg" alt="KakaoTalk 20260706 204148331" class="wp-image-4262" title="경계의 형식, 질문을 닫는 설명 - 두산인문극장 〈모어 라이프〉 23"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8331-666x500.jpg 66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8331-300x225.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8331-150x113.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KakaoTalk_20260706_204148331.jpg 750w" sizes="auto, (max-width: 666px) 100vw, 666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다시 또 먼 미래. 해리가 죽고 다비나도 죽고 홀로 남은 브리짓이 인류의 마지막 장례식까지 지켜보았다는 결말은 극이 지금껏 끌고 왔던 질문의 방향을 조금 돌린다. 브리짓을 브리짓으로 증명해 줄 관계가 완전히 소멸했을 때도 브리짓은 브리짓인가. 관계의 배치로 규정되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남기고 막이 내린다.</p>



<p class="wp-block-paragraph">생각해 보면 경계의 불확실성을 기꺼이 품을 수 없기에 우리는 인간인지 모른다. 설명하는 코러스의 개입도 삶을 지속하기로 한 브리짓의 선택도 결국 불확실함 앞에서 깔끔히 손을 놓지 못하는 충동에서 나온다. 그런 점에서 〈모어 라이프〉는 온기 없는 주제를 인체의 온도로 품는 지극히 인간적인 작품이다.</p>



<p class="wp-block-paragra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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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em>* 한국연극평론가협회 2026 봄 워크숍에서 작성한 글 입니다.</em></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p class="wp-block-paragraph"><strong>—<br>연극 〈모어라이프〉</strong><br>2026.04.29.–05.17. 두산아트센터 Space111<br>두산인문극장 2026 / 작 Lauren Mooney &amp; James Yeatman / 연출 민새롬 / 번역 김수아</p>



<p class="wp-block-paragraph"></p>



<p class="wp-block-paragraph"></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b%aa%a8%ec%96%b4%eb%9d%bc%ec%9d%b4%ed%94%84/">경계의 형식, 질문을 닫는 설명 &#8211; 두산인문극장 〈모어 라이프〉</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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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애도에 머무를 권리 &#8211;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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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홍서아]]></dc:creator>
		<pubDate>Thu, 25 Jun 2026 12:07:32 +0000</pubDate>
				<category><![CDATA[비평]]></category>
		<category><![CDATA[연극]]></category>
		<category><![CDATA[공연평론가홍서아]]></category>
		<category><![CDATA[남겨진사람의시간]]></category>
		<category><![CDATA[애도]]></category>
		<category><![CDATA[애도에머무를권리]]></category>
		<category><![CDATA[연극비평]]></category>
		<category><![CDATA[왝왝이가그곳에있었다]]></category>
		<category><![CDATA[왝왝이가그곳에있었다리뷰]]></category>
		<category><![CDATA[왝왝이가그곳에있었다후기]]></category>
		<category><![CDATA[왝왝이아그곳에있어다비평]]></category>
		<category><![CDATA[청소년극왝왝이가그곳에있었다]]></category>
		<category><![CDATA[크리에이티브윤슬]]></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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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2026년 6월 19일부터 2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크리에이티브 윤슬의 청소년극 &#60;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62;는 이로아의 소설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를 원작으로 한다.&#160;&#46;&#46;&#46;</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c%99%9d%ec%99%9d%ec%9d%b4%ea%b0%80%ea%b7%b8%ea%b3%b3%ec%97%90%ec%9e%88%ec%97%88%eb%8b%a4/">애도에 머무를 권리 &#8211;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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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2026년 6월 19일부터 2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크리에이티브 윤슬의 청소년극 &lt;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gt;는 이로아의 소설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를 원작으로 한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350"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왝왝-포스터-사진-350x500.jpg" alt="왝왝 포스터 사진" class="wp-image-4201" title="애도에 머무를 권리 -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24"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왝왝-포스터-사진-350x500.jpg 3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왝왝-포스터-사진-210x300.jpg 21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왝왝-포스터-사진-150x214.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왝왝-포스터-사진.jpg 461w" sizes="auto, (max-width: 350px) 100vw, 350px" /></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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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초라한 고백: 과정을 잊은 어른의 오독</strong></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 is-resized"><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9-700x467.jpg" alt="공연사진 왝왝 9" class="wp-image-4202" style="width:700px;height:auto" title="애도에 머무를 권리 -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25"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9-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9-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9-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9-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9-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9-2048x1365.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크리에이티브 윤슬</figcaption></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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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내 질문은 처음부터 엇나간 것이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공연을 보고 나온 뒤, 나는 하수구에 갇혔다. 처음에는 그것을 심연이라 읽었다. 그것은 가장 쉬운 독해였다. 이후 하수구는 망각의 공간이 되었고,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공간이 되었다. 나는 그 상징의 계보를 따라가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이 붙들고 있었던 것은 죽음의 이미지가 아니라 애도의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하수구는 애도의 통로다. 하수구를 공간이 아니라 애도의 시간으로 읽는 순간, 이 공간은 더 이상 목적지가 아니라 통로가 된다. 이 작품은 통로를 지나 목적지에 도착하라고 부추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통로를 이해하려는 이야기다. 통로를 빠져나오는 법보다, 아직 혹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애도의 과정을 청소년의 눈으로 읽어낸 것이다. 즉 애도의 과정 자체를 묻는다.</p>



<p class="wp-block-paragraph">통로 역시 공간이다. 통로는 머물 수도, 돌아갈 수도, 지나갈 수도,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고민의 시간과 우물쭈물한 시간 모두 과정이다. 우리 사회는 그 통로를 자꾸 지름길로 만들려고 하고, 재선은 거기서 버티며, 연서는 걸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도를 끝내는 법이 아니라, 누군가의 애도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그러므로 나는 다시 고백한다. 하수구를 심연이나 망각으로 읽었던 것은 도착만 찾느라 머무름을 읽지 못한 어른의 오독이었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청소년극의 청소년성: 과정을 겪는 존재들의 연대</h3>



<p class="wp-block-paragraph">청소년, ‘아직 모르겠어요’를 견디는 존재들. 정체성, 관계, 상실, 진로도 모두 진행형인 10대. 어른도 아이도 아니며 완료된 사람들이 아니라 과정을 겪고 있는 사람들. 이 작품의 청소년성은 여기에 있다. 청소년은 목적지보다 과정에 머무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지하차도 침수사건의 생존자인 연서는 기억의 무게와 현실의 요구 사이에서 흔들린다. 연서의 아버지는 애도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의 속도가 연서를 향해 작동하는 외부의 소리다. 그는 약을 버리고, 추모 게시판을 철거하며,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회복이 아니라 복귀다. 애도의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자리에서 회복은 가능하지 않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36-700x467.jpg" alt="공연사진 왝왝 36" class="wp-image-4203" title="애도에 머무를 권리 -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26"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36-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36-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36-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36-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36-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36-2048x1365.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크리에이티브 윤슬</figcaption></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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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왝왝이이자 재선이는 애도의 통로에 머무는 인물이다. 유가족인 그는 기억을 잃게 만드는 열매를 먹고도 끝내 기억을 버리지 못한다. 하수구 너머 무명의 세계에서 그의 기억은 사라지는 대신 나무가 되어 자란다. 재선이가 지키려는 것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를 기억하는 시간이다. 재선은 애도의 지속을 말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현실을 견디는 연서와 기억 속으로 침잠한 재선이는 하수구를 통해 마주한다. 현실과 기억은 대립하지 않는다. 둘의 만남은 애도의 서로 다른 시간이 마주치는 것이다. 연서가 재선을 만나기 위해 하수구를 통과해 무명의 세계로 가는 것은 기억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과 다시 관계를 맺기 위한 발걸음이다. 죽은 길고양이 ‘옥이’를 추모하는 행위는 그 통로를 건너는 첫 번째 용기이기도 하다.</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51-700x467.jpg" alt="공연사진 왝왝 51" class="wp-image-4204" title="애도에 머무를 권리 -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27"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51-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51-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51-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51-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51-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51-2048x1365.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크리에이티브 윤슬</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혜민과 호정은 연서를 둘러싼 두 가지의 애도 방식이다. 혜민은 있는 그대로를 지켜보며 기다리고, 호정은 기억과 추모를 끝까지 붙든다. 두 사람은 애도의 방식과 속도가 하나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호정과 혜민은 연서를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속도의 애도가 공존할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앞선 잘못된 질문은 어른의 시각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극복은 했고? 회복은 아직이야?’라고 묻는 어른의 질문에 연서와 재선이는 ‘아직 모르겠어, 아직 거기 있어, 아직 힘들어’로 대답한다. 이 작품은 그 ‘아직’을 견뎌내는 청소년들의 시간을 보여준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혜민과 호정의 연대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둘은 연서와 재선의 시간을 인정하고, 이 둘의 속도를 기다린다. 연대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을 견디는 일임을 혜민과 호정은 보여준다. 그 소리가 “왝왝”일지언정 “나 진짜 여기 있어”라는 외침으로 들어주는 태도. 그 긍휼과 기다림이야말로 이 작품이 말하는 연대의 윤리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남겨진 사람의 시간: 애도에 머무를 권리</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연극 &lt;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gt;에서 기억은 물소리, 즉 청각 이미지로 열린다. 빗소리는 보슬비에서 폭우로 청각적 이미지를 확장시킨다. 이 청각 이미지는 강조점인 폭우를 사이에 두고 남겨진 자들의 상태를 들려준다. 빗소리의 변화는 연서의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을 들려준다. 보슬비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고, 폭우는 여전히 현재를 덮치는 기억이자 감정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빗소리는 재선의 하수구 장면과 이어진다. 재선이 하수구에서 머무를 때 빗소리는 물방울 소리로 축소된다. 이때 물방울 소리는 리벌브를 사용해 음의 진폭 역시 감각하게 한다. 비가 세차게 내린 후 하수구의 물방울 소리는 ‘남겨진 시간’을 상징한다. 재선이에게 애도는 끝나지 않았는데 세상은 이미 지나가 버린 상태다. 보슬비를 눈물, 폭우를 집단적 슬픔이나 생존자나 유가족의 사무치는 감정의 심상이라면 하수구의 물방울 소리와 그 진폭은 갇힌 기억의 상흔이 된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68-700x467.jpg" alt="공연사진 왝왝 68" class="wp-image-4205" title="애도에 머무를 권리 -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28"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68-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68-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68-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68-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68-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68-2048x1365.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크리에이티브 윤슬</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생존자와 유가족에게 부재는 ‘자리’로 남는다. 이 작품에서 망자의 흔적은 빈 의자로 형상화된다. 의자는 비어 있는 순간부터 ‘누가 없는가’를 드러낸다. 의자는 빈자리이자 남겨진 자리, 돌아오지 못한 자리를 물질적으로 현전시키는 오브제다.</p>



<p class="wp-block-paragraph">그러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이 빈 의자는 기억나무를 뽑는 무브먼트의 도구로 전환되면서 상징의 일관성을 잃는다. 앞선 장면에서 부재와 기억의 물성을 획득한 오브제가 마지막에서 기억을 처리하는 방식이자 행위의 중심 오브제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때 뽑는 행위가 기억을 제거하는 행위인지, 기억을 붙드는 방식의 변화인지, 혹은 기억을 끝맺는 의식인지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하나의 오브제에 서로 다른 연극 언어가 중첩되는 순간, 상징은 확장되기보다 충돌한다. 그 결과 오브제가 획득했던 기호와 의미는 흔들리고, 하이라이트의 상징은 오히려 과부하를 일으킨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박탈된 애도: 궁핍한 공감, 가난한 이해</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우리는 정말 애도를 끝낸 것인가? 아니면 애도를 중단당한 것인가?&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 둘은 전혀 다르다. 애도를 끝낸 사람은 자신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애도를 중단당한 사람은 그 시간이 끊긴 자리에서 계속 머물게 된다. 만약 ‘이제 밖으로 나오자’를 말하고 싶다면 그 전제가 중요하다. 충분히 울었는가. 말했는가. 추모했는가. 함께 연대했는가. 여기에 대한 답이 없이 ‘현실로 돌아와’라는 제안은 누군가에게는 구조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때문에 이 작품의 질문은 단순히 참사나 추모의 문제가 아니라 ‘회복을 말한 자격은 누구에게 있는가?’라는 질문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 작품은 기억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이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보여준다. 연서는 그 통로를 건너고 있고, 재선이는 그 통로에 머물러 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속도를 생존의 윤리로 만든 대한민국.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정확하게, 목표를 겨냥해서 전력으로 질주해야 살아남는 대한민국. 이 사회에서 머무를 권리는 사치로 보인다. 다들 뛰는데 넘어졌다고 앉아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사치며, 현실을 모르는 어린이의 칭얼거림으로 간주된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47-700x467.jpg" alt="공연사진 왝왝 47" class="wp-image-4206" title="애도에 머무를 권리 -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 29"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47-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47-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47-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47-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47-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6/공연사진_왝왝_47-2048x1365.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크리에이티브 윤슬</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애도의 유통기한은 과연 누가 정하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타인의 슬픔에 종료 시점을 요구하기 시작했는가? ‘애도도 빨리해, 추모도 적당히 해, 잘못도 인정했으면 됐잖아, 상처도 이제 극복해, 정신력으로 버텨’. 공동체에는 생산성을 개인에는 효율성을 요구하는 이 시대는 이제 추모에도 생산성을 애도에도 효율성을 강요하며 속도와 종결을 요구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사실 인간 감정의 속도는 LTE가 아니다. 슬픔은 다운로드가 아니고, 애도는 업데이트가 아니며, 추모는 완료 버튼을 누른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죄책감, 상실, 그리움도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마저도 빠르게 정리되기를 원한다. 애도는 언어로 설명되면 해결된 것으로 간주 되고, 추모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종료된다. 상처는 극복의 서사로 환원되고, 남겨진 사람에게는 현실 복귀가 요구된다. 기억하자고 말하면서도 너무 오래 기억하는 사람을 불편해하고, 슬퍼하라고 말하면서도 충분히 슬퍼하는 사람을 견디지 못한다. 또한 기억하라고 하지만 정작 기억을 함께 감당할 사회적 장치는 없는 상태다.</p>



<p class="wp-block-paragraph">청소년극 &lt;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gt;는 바로 그 말소리만 요란한 궁핍한 공감과 가난한 이해에 질문을 던진다. 유통기한 없는 애도에도 유통기한을 만들어내야 하는 한국 사회. 이 작품이 끝내 묻고 있는 것은 애도가 아니라, 타인의 슬픔조차 기다려주지 못하는 우리의 속도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_</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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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c%99%9d%ec%99%9d%ec%9d%b4%ea%b0%80%ea%b7%b8%ea%b3%b3%ec%97%90%ec%9e%88%ec%97%88%eb%8b%a4/">애도에 머무를 권리 &#8211; 크리에이티브 윤슬 〈왝왝이가 그곳에 있었다〉</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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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열차 999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8211; 성북동비둘기 〈빨간 피 터지는 고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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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박효경]]></dc:creator>
		<pubDate>Fri, 15 May 2026 12:09:1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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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On My Way 전장으로 향하는 자의 노래가 뚝섬플레이스 로비에 흐른다. 객석이 채워지는 동안 이 노래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무언가를 예비한다.&#46;&#46;&#46;</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b%b9%a8%ea%b0%84%ed%94%bc%ed%84%b0%ec%a7%80%eb%8a%94%ea%b3%a0%eb%b0%b1/">열차 999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8211; 성북동비둘기 〈빨간 피 터지는 고백〉</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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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b>On My Way</b></h2>
<p>전장으로 향하는 자의 노래가 뚝섬플레이스 로비에 흐른다. 객석이 채워지는 동안 이 노래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무언가를 예비한다. 이 공연이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원작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아는 관객이라면 이미 어떤 아이러니를 감지할 것이다. 원숭이 빨간 피터의 이야기는 목적지를 향한 여정이 아니라 자유를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적응의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On My Way는 그 서사를 다른 방식으로 써 내려가겠다는 힌트다.</p>
<p>성북동비둘기는 원작을 재료로 삼아 연극을 만들어왔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운명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주제를,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소인국과 거인국, 공중에 떠다니는 섬의 이미지를,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는 노동이라는 소재를 추출했다. 텍스트는 흔적도 찾을 수 없을지언정 주제만큼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는 놀이판이 성북동비둘기의 연극인데, 〈빨간 피 터지는 고백〉은 그 반대를 향한다. 인간을 닮아버린 원숭이의 이야기, 보고 형식, 그리고 자유의 역설까지 공연은 원작의 구조와 텍스트를 충실히 따르지만 그것을 통해 완전히 다른 곳을 가리킨다. 카프카의 피터가 문명과 교양의 구조를 폭로하는 자였다면, 김현탁의 피터는 그 구조 안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고백하는 자다. 외피는 카프카의 것이되 지향은 오롯이 김현탁의 것이다. 텍스트에 가까이 다가가 주제를 완전히 전복한 이 역설이 〈빨간 피 터지는 고백〉을 성북동비둘기의 20년 역사에서 유독 낯선 작품이자 가장 사적인 작품으로 만들었다.</p>
<p>연출가로 20년을 살아온 그가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직접 올랐다. 김현탁에게 창안·연출이라는 수식어는 공연의 컨셉에서 대본, 무대와 소품, 의상과 음악까지 모든 층위가 오직 한 사람의 감각에서 발원한다는 선언이었다. 그 선언이 이번에는 배우의 몸까지 포함한다. 〈빨간 피 터지는 고백〉의 재료는 카프카만이 아니다. 김현탁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것들을 무대 위에 쏟아내어 온기가 식을세라 관객에게 직접 건넨다.</p>



<figure class="extendedwopts-md-center mzb-image mzb-image-a494850b"><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683" height="1024" class="wp-image-3934 hover-effect-static filter-none mask mask-none"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2.jpg" alt="KakaoTalk 20260508 203519688 02" title="열차 999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 성북동비둘기 〈빨간 피 터지는 고백〉 30"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2.jpg 683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2-200x300.jpg 2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2-333x500.jpg 333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2-150x225.jpg 150w" sizes="auto, (max-width: 683px) 100vw, 683px" /><figcaption>ⓒ김철성 / 사진 제공: 성북동비둘기</figcaption></figure>



<h2><b>빨간 피 터지는 고백</b></h2>
<p>뚝섬플레이스의 피터는 김현탁이 살아온 시간을 차례로 통과한다. 혼자였던 어린 김현탁을 달래준 〈은하철도 999〉, 아버지의 목소리로 몸에 각인된 〈전선야곡〉, 일본 문화 개방 이전 청년들 사이에서 암호처럼 유통되던 영화 〈러브레터〉의 서정, 광고업계에 몸담았던 시절의 흔적이 녹아든 소주, 5.18 계엄 방송과 전장의 포격 소리까지. 이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의 몸 안에서 충돌하고 공명하면서 그의 신체는 동시대의 집단 기억을 담는 그릇이 된다. 텔레비전이 키운 아이, 광고를 만들던 청년, 아버지의 노래와 일본 영화를 몸에 새긴 사람. 단 하나의 탈출구를 따라 걸어온 그 모든 모방과 흡수가 지금 이 무대 위의 몸을 만들었다. 뚝섬의 피터는 구속에서 가능성을 찾아 교양을 전복한다.</p>
<p>그렇다면 이토록 사적인 고백 앞에서 관객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빨간 피 터지는 고백〉이 관객에게 요청하는 것은 공감이 아니라 인식이다. 공감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감정을 다시금 확인할 뿐, 확장되지 못한다. 타인과 만나지 못하는 나는 세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내 눈앞의 낯선 존재가 거쳐온 낯선 시간을 함께 통과하면서 그가 어떤 교양을 강요받아 왔는지, 어떤 출구를 찾아 헤매었고 어떤 창문을 닫아버렸는지를 직면하는 것. “저는 그저 보고를 드렸을 뿐입니다.”라는 피터의 말이 그저 차가운 진술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대한 단단한 긍정으로 들리는 것은 관객이 그러한 인식의 자리에 도달했을 때다.</p>



<figure class="extendedwopts-md-center mzb-image mzb-image-f20eeee9"><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683" height="1024" class="wp-image-3935 hover-effect-static filter-none mask mask-none"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5.jpg" alt="KakaoTalk 20260508 203519688 05" title="열차 999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 성북동비둘기 〈빨간 피 터지는 고백〉 31"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5.jpg 683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5-200x300.jpg 2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5-333x500.jpg 333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5-150x225.jpg 150w" sizes="auto, (max-width: 683px) 100vw, 683px" /><figcaption>ⓒ김철성 / 사진 제공: 성북동비둘기</figcaption></figure>



<h2><b>Don&#8217;t Stop Me Now</b></h2>
<p>원숭이 가면을 벗은 피터가 피 터지는 고백을 마무리할 때 프레디 머큐리의 〈Don&#8217;t Stop Me Now〉가 공간을 채운다. 선글라스를 끼고 팔짱을 낀 김현탁이 사진에서 보던 그 모습 그대로 꼿꼿하게 선다. 20년 넘게 다른 사람의 몸을 빚어온 사람이 카프카의 옷을 입고 처음으로 자기 몸으로 선 것이다. 여기는 목적지가 아니라 또 다른 출발지라고, 이 꼬장꼬장한 연극쟁이의 얼굴이 말한다. On My Way로 시작한 여정이 Don&#8217;t Stop Me Now까지 왔다.</p>
<p>〈은하철도 999〉의 원작자 마츠모토 레이지에 따르면 999는 미완성을 뜻한다. 1000이 되면 철이는 어른이 되고 메텔과도 이별해야 한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소년에게 메텔은 청춘이자 꿈이자 자기 안의 환영이었다. “안녕, 메텔. 잘 가요, 안녕.” 하얀 원 안에 선 피터가 하늘을 향해 세차게 손을 흔든다. 연기와 고백의 경계가 이미 지워진 그 손짓에 1000이 되지 않으려는 999의 의지가 응축된다.</p>
<p>번지가 없어져도 문명에 밀려나도 떠나지 않는 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경계를 떠돌며 구구구 하고 우는 새. 성북동비둘기의 999도 은하철도 999도 끝내 도착하지 않는 여정을 산다. 열차 999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길 위에 서 있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p>



<figure class="extendedwopts-md-center mzb-image mzb-image-26e9c302"><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683" height="1024" class="wp-image-3936 hover-effect-static filter-none mask mask-none"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8.jpg" alt="KakaoTalk 20260508 203519688 08" title="열차 999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 성북동비둘기 〈빨간 피 터지는 고백〉 32"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8.jpg 683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8-200x300.jpg 2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8-333x500.jpg 333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5/KakaoTalk_20260508_203519688_08-150x225.jpg 150w" sizes="auto, (max-width: 683px) 100vw, 683px" /><figcaption>ⓒ김철성 / 사진 제공: 성북동비둘기</figcaption></figure>



<p>&nbsp;</p>
<p><strong><span class="notion-enable-hover" data-token-index="0">연극 〈빨간 피 터지는 고백〉</span></strong><span class="notion-enable-hover" data-token-index="1"> <br>2025.11.27.–12.07. 뚝섬플레이스 <br>성북동비둘기 / 원작 프란츠 카프카 </span>「학술원에 드리는 보고」<span class="notion-enable-hover" data-token-index="3"> / 창안・연출・연기 김현탁</span><!-- notionvc: 43ddbe50-3e13-4c12-8750-a24bf5e70bb3 --></p>



<p><span style="color: #808080;">필자는 성북동비둘기의 상주 드라마터그로 활동하고 있으나, 이 작품의 창작에는 참여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span></p>



<p class="wp-block-paragra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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