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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극평론 &#8211; 사이:비평</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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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단평] 연극 외경</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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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홍서아]]></dc:creator>
		<pubDate>Thu, 17 Sep 2026 19:19:49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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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wp-block-image"><img fetchpriority="high" decoding="async" width="358"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9/포스터_외경_0802800-358x500.jpg" alt="포스터 외경 0802800" class="wp-image-4818" title="[단평] 연극 외경 1"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9/포스터_외경_0802800-358x500.jpg 35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9/포스터_외경_0802800-215x300.jpg 215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9/포스터_외경_0802800-150x21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9/포스터_외경_0802800-768x1073.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9/포스터_외경_0802800.jpg 800w" sizes="(max-width: 358px) 100vw, 358px" /></figure>
</div>



<div class="wp-block-column is-vertically-aligned-center is-layout-flow wp-block-column-is-layout-flow" style="flex-basis:50%">
<p class="wp-block-paragraph">이타심과 존재론이 49:51로 팽팽한 대사액션. 2인극으로 충분했을 무대에 5분 남짓 올라 멕시코말만 남기고, 얼굴도 없이 무대 밖을 떠도는 제3의 인물 — 무엇을 뺄지보다 어디에 1을 더할지를 고민한 흔적이 삼연의 군더더기. 그럼에도 하고자 하는 말은 끝내 전달하는 작가의 뚝심.</p>



<p class="wp-block-paragraph">-공연예술평론가∙연극학연구자 홍서아</p>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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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b%8b%a8%ed%8f%89-%ec%99%b8%ea%b2%bd/">[단평] 연극 외경</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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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8211;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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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김소정]]></dc:creator>
		<pubDate>Mon, 17 Aug 2026 10:44:36 +0000</pubDate>
				<category><![CDATA[비평]]></category>
		<category><![CDATA[연극]]></category>
		<category><![CDATA[ai윤리]]></category>
		<category><![CDATA[김소정]]></category>
		<category><![CDATA[연극비평]]></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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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tegory><![CDATA[윤주호작가]]></category>
		<category><![CDATA[장진웅연출]]></categ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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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c%97%86%eb%8a%94%ec%9e%98%eb%aa%bb/">‘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8211;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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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지난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다’라는 말은 사건을 마무리하는 가장 손쉬운 문장 중 하나가 되었다. 크고 작은 참사가 지나간 자리에는 ‘복합적인 요인’과 ‘관계 부처 간 협의’가 남았고, 책임은 여러 주체 사이로 흩어졌다. 누군가의 잘못을 묻는 일은 언제나 가능해 보였지만, 정작 그 잘못이 정확히 누구에게 귀속되는지를 묻는 순간 답은 희미해졌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생성형 AI의 등장과 함께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무엇을 추천하고 무엇을 학습하는지조차 완전히 설명하기 어려운 알고리즘이 인간의 일상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AI가 초래한 피해에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 〈없는 잘못〉은 이 질문을 AI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문제로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AI 이전에는 과연 책임을 제대로 규명하고,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물어왔는가.&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연극 &lt;없는 잘못&gt;(2026.07.17.~2026.07.26., 미아리고개예술극장)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20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당선작인 윤주호의 희곡을 같은 해 단막극으로 초연한 뒤 장막극으로 발전시킨 이번 작품에서 AI 추천 피드가 청소년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설정은 표면에 놓인 사건에 가깝다. 작품이 궁극적으로 겨누는 것은 AI라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 발생한 뒤에도 책임의 주체를 특정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지 오래된 구조다. 그런 의미에서 AI는 새로운 가해자라기보다 이미 존재해온 무책임의 구조를 드러내는 장치에 가깝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무엇이 ‘없는’가</strong></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 is-resized"><img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700x467.jpg" alt="KakaoTalk 20260722 131925295 01" class="wp-image-4554" style="width:700px;height:auto"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 2"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1-2048x1365.jpg 2048w" sizes="(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xfe0f;창작집단양산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극은 특정 AI 알고리즘 영상에 노출된 청소년들의 극단적인 죽음이라는, 실제 있을 법한 사건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극이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것은 이 사건이 AI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극 중 알고리즘을 개발한 회사의 대표와 정부만이 알고 있었던 진실―극단적인 선택을 한 아이들이 모두 가정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음―은 AI라는 첨단 기술의 스캔들 뒤에 훨씬 오래된 폭력의 구조가 숨어 있었음을 폭로한다. AI는 방아쇠를 당겼을 뿐, 총알을 장전한 것은 다른 무엇이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여기서 극이 정교하게 파고드는 것은 ‘누가 잘못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잘못을 규명할 수 있는 구조가 애초에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조사관은 스스로도 온전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조사를 진행하고, 회사 개발팀 팀원은 경영진이 이미 문제를 예상했지만 침묵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혼자 뒤집어쓰기 싫다고 말한다. 극은 이들 각자에게 명확한 악의가 있었다고 단죄하지 않으며,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어 개념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합적인 인과관계’ 속에서 책임의 주체 자체가 증발해 버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 관련자 전원이 혐의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되는 결말은, 이것이 개인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애초부터 책임을 흩어놓도록 설계된 시스템의 승리임을 냉정하게 짚어낸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제목 ‘없는 잘못’은 그래서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표면적으로는 ‘내 잘못은 없다’라는 각 인물의 항변이지만, 더 깊은 층위에서는 애초에 잘못을 특정할 수 있는 좌표 자체가 이 사회에 없다는 진단이다. 극은 이 부재를 냉소로 흘려보내지 않고, 관객에게 ‘우리 모두 여기에 일조하고 있었음’을 무대 연출을 통해 시각화한다. 일상의 보도블록과 이어진 극장 객석의 문이 열리는 순간, 극이 진행되던 무대에 일상의 시공간이 침투해오며 극의 시·공간과 뒤엉킨다. 이를 통해 브레히트의 서사극에서 배우가 대사를 통해 관객에게 현실을 인지시켰던 것처럼, 〈없는 잘못〉은 미아리고개극장이라는 공간적 특징을 사용해 객석에 앉아 사건을 관망하던 관객마저 책임을 외면해 온 구조의 목격자 자리로 이끈다.</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블랙박스(black box)의 변화와 시각화&nbsp;</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본래 ‘블랙박스’란 내부의 작동 원리를 알 수 없는 채 입력과 출력만을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는 공학적 용어다. 우리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 오로지 무언가를 넣었을 때 무엇이 나오는지로만 그것을 이해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정반대의 맥락에서도 사용되어 왔다. 항공기 사고 조사에 쓰이는 블랙박스(비행기 기록장치)는 역설적으로 사고의 원인, 즉 ‘누구의, 무엇의 잘못인가’를 규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치다. 이 기록장치는 참사 이후 가장 먼저 수색하는 대상이자 책임 소재를 가리는 유일한 물증이 된다. 자동차에 설치되는 블랙박스(대시캠) 역시 마찬가지다―사고의 과실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늘 무언가를 기록하고 저장해 둔다. 즉 ‘블랙박스’라는 단어는 이해할 수 없는 불투명함과, 불투명함 속에서도 진실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모순적인 기표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700x467.jpg" alt="KakaoTalk 20260722 131925295 06" class="wp-image-4555"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 3"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6-2048x1365.jpg 2048w" sizes="(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xfe0f;창작집단양산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없는 잘못〉은 이 모순을 정확히 겨냥한다. 극 중 블랙박스는 크게 두 가지의 맥락에서 사용된다. 하나는 AI를 블랙박스에 빗대는 언어적인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무대큐브(블랙박스)이다. 이때, 후자의 블랙박스는 증식할수록 사건을 규명하는 항공기록장치나 대시캠의 기능과는 정반대로 작동한다. 박스가 늘어갈수록 무대는 오히려 더 불투명해지고, 관객은 저 안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된다. 사건의 진실이 파헤쳐질수록 투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짙어지는 이 역설이야말로, 극이 말하고자 하는 우리 시대 책임 구조의 초상이다. 데이터는 쌓이고 알고리즘은 정교해지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 한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누구도 설명하지 못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동시에 극은 여기에 또 다른 오랜 별명, 텔레비전의 ‘바보상자’를 겹쳐놓는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박스와, 익숙한 이미지를 반복하여 사고를 대신해 온 바보상자가 겹칠 때, 작품은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과거 텔레비전이 전달하는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우리는 AI가 내놓는 답변 역시 손쉽게 진실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증식하는 검은 박스(무대 큐브)는 단순한 소품을 넘어, 진실을 확인하는 대신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동시대의 불투명성을 물질화하는 오브제로 기능하게 된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decoding="async"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02-700x467.jpg" alt="KakaoTalk 20260722 131925295 02" class="wp-image-4556"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 4"><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xfe0f;창작집단양산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특히, 극 중후반, 이 박스들이 격자판 형태로 재배치되며 미로 같은 구조를 만들어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는 조사와 추적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선형적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길을 잃도록 설계된 미로 속에서 헤매는 행위임을 공간적으로 증언한다. 이때 외계인 형상을 한 인물(음모론자)이 들어와 진실에는 관심 없는 언론의 행태를 경고하고, 뒤로는 ‘세상이 왜 이래’라고 말하며 끊임없이 한탄하는 나훈아의 〈테스형!〉이 재생된다. 이 이질적인 캐릭터의 등장은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 사이,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모호하게 흔들어 놓는다. 이후 계속해서 등장하는 강렬한 〈테스형!〉의 멜로디는 극 중의 대사는 특정한 누군가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책임을 분명하게 규명할 수 있는 현실에 한탄의 숨을 내쉬며 대사와 노래를 분리한다. 과연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대사일지, 아니면 노래일지 관객에게 질문하면서 말이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콩트가 된 비극, 비극이 된 콩트</strong></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700x467.jpg" alt="KakaoTalk 20260722 131925295" class="wp-image-4557"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 5"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2048x1365.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xfe0f;창작집단양산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장진웅 연출은 청소년의 죽음과 학대, 언론의 부패, 정경유착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 본 작품을 연출하는 데 있어 콩트적 어조를 선택한다. 기자가 내부고발자인 개발팀 임원을 뒤쫓는 장면이 달리기에서 수영으로, 다시 총싸움을 방불케 하는 과장적인 행동으로 확장되는 방식은 명백히 희극적인 과잉이다. 이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 조사관과 기자가 이어서 서로가 진실을 독점하기 위해 주도권 싸움을 하고, 이 과정은 정열의 탱고로 풀어진다. 또한 내부고발자가 조사실에서 서명하는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을 때, 조사관은 한 편에서 당구를 친다. 누군가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이,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재미나 흥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장진웅은 연속되는 콩트 장면에서 관객이 마음 편하게 웃어도 되는지, 아니면 그것을 보고 불쾌해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든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700x467.jpg" alt="KakaoTalk 20260722 131925295 11" class="wp-image-4558" title="‘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 6"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KakaoTalk_20260722_131925295_11-2048x1365.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xfe0f;창작집단양산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한편으로 진중함과 콩트의 병치는 극 중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덮친다. 비극이 곧 콘텐츠가 되고 콘텐츠가 곧 이윤이 되는 현실의 순환 구조는, 진중함과 콩트의 결합 그 자체가 아닌가? 작금의 현실을 무거운 톤으로만 전달했다면 관객은 익숙한 사회고발극의 구조 안에서 안전하게 슬퍼하고 극장을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웃음과 죄책감이 뒤섞인 불편한 감정 상태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관객은 ‘책임을 진다’라는 것이 과연 이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라는 회의와 마주하게 된다. &nbsp;</p>



<p class="wp-block-paragraph">그래서 막이 내린 뒤에서 &lt;테스형!&gt;의 멜로디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무대와 객석, 극장과 일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자리에서 반복되는 이 노래는 책임을 묻는 질문이 끝내 명확한 답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환기한다. 극은 끝까지 책임을 추적하지만, 그 책임을 온전히 귀속시킬 한 사람을 끝내 만들지 않는다. 대신 질문만 남긴다. 우리는 정말 책임자를 찾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책임자가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것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것인가. 〈없는 잘못〉이 무대 위에서 끝내 보여주는 것은 ‘잘못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잘못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누구의 것으로도 만들 수 없는 세계인지도 모른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details class="wp-block-details is-layout-flow wp-block-details-is-layout-flow"><summary>글/공연∙뮤지컬 평론가 김소정</summary>
<p class="wp-block-paragraph">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공연예술학전공 석사 졸업 및 박사 수료<br>제4회 국립극장 젊은 공연예술 평론가상 장려상 수상 <br>한국경제 아르떼 「김소정의 무대 밖 뮤지컬」 연재</p>



<p class="wp-block-paragraph">뮤지컬을 중심으로 공연예술 연구와 평론을 하며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공연은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들의 집합체이자 변형이며, 공연 비평은 시리도록 아름답지만 찰나의 순간 사라져가는 것들을 언어로 담아내는 것이라 생각한다. 드라마터그로도 활동하고 있다.</p>
</details>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p class="wp-block-paragraph">&#8211;<br><strong>연극 〈없는 잘못〉</strong><br>2026.07.17~2026.07.26 미아리고개예술극장<br>창작집단 양산박 / 작 윤주호 연출 장진웅 드라마투르그 오판진</p>



<p class="wp-block-paragraph"></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c%97%86%eb%8a%94%ec%9e%98%eb%aa%bb/">‘없는’ 잘못은 정말 ‘없는’ 것인가 &#8211; 창작집단 양산박 〈없는 잘못〉</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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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단평] 연극 소녀소년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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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박효경]]></dc:creator>
		<pubDate>Thu, 06 Aug 2026 04:30:3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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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wp-block-image"><img decoding="async"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8/26009562_p-375x500.gif" alt="26009562 p" class="wp-image-4498" title="[단평] 연극 소녀소년들 7"></figure>
</div>



<div class="wp-block-column is-vertically-aligned-center is-layout-flow wp-block-column-is-layout-flow" style="flex-basis:50%">
<p class="wp-block-paragraph">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로 선택한 여성 생존자에게는 숨을 쉬는 영웅적인 일 외에도 잔혹한 몫이 부과된다. 그 참사가 왜 일어났고 왜 막지 못했는지 스스로 변호해야 함과 동시에, 증언이 상대를 지나치게 불편하게 하지 않도록 적정 농도의 당의를 입혀야 하는 것. 포장된 진상보다 쓰고 쓰라린 것은 젠더화된 증언 노동이다. 미세한 온도차까지 좇는 연기로 그 아이러니를 육화한 날카로운 모노드라마.</p>



<p class="wp-block-paragraph">-공연예술평론가 박효경</p>
</div>
</div>



<p class="wp-block-paragraph"><strong>연극〈소녀소년들〉</strong><br>2026.07.31.–08.09. 더줌아트센터<br>극단 아몬드 / 작 데니스 켈리(Dennis Kelly) / 연출 박종현 / 드라마터그∙번역 정다영</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b%8b%a8%ed%8f%89-%ec%86%8c%eb%85%80%ec%86%8c%eb%85%84%eb%93%a4/">[단평] 연극 소녀소년들</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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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단평] 연극 잠들고 싶지 않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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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홍서아]]></dc:creator>
		<pubDate>Wed, 29 Jul 2026 13:01:02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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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퍼포머 셋, 침대 하나, 베개와 이불만으로 아르코 대극장을 꽉 채우는 에너지. 부모의 심금을 울리고, 아이의 상상력을 깨우는 50분. “제발 좀&#46;&#46;&#46;</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b%8b%a8%ed%8f%89-%ec%9e%a0%eb%93%a4%ea%b3%a0%ec%8b%b6%ec%a7%80%ec%95%8a%ec%95%84/">[단평] 연극 잠들고 싶지 않아!</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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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wp-block-ima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357"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00._04-잠들고-싶지-않아-썸네일-357x500.jpg" alt="00. 04 잠들고 싶지 않아 썸네일" class="wp-image-4342" title="[단평] 연극 잠들고 싶지 않아! 8"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00._04-잠들고-싶지-않아-썸네일-357x500.jpg 357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00._04-잠들고-싶지-않아-썸네일-214x300.jpg 214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00._04-잠들고-싶지-않아-썸네일-150x21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00._04-잠들고-싶지-않아-썸네일-768x1075.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00._04-잠들고-싶지-않아-썸네일.jpg 800w" sizes="auto, (max-width: 357px) 100vw, 357px" /></figure>
</div>



<div class="wp-block-column is-vertically-aligned-center is-layout-flow wp-block-column-is-layout-flow" style="flex-basis:50%">
<p class="wp-block-paragraph">퍼포머 셋, 침대 하나, 베개와 이불만으로 아르코 대극장을 꽉 채우는 에너지. 부모의 심금을 울리고, 아이의 상상력을 깨우는 50분. “제발 좀 자라!“가 절로 터져 나오는 체코발 취침 소동극. 어린이극이라고 방심했다가, 올해도 아시테지에 보기좋게 한 방 먹었다.</p>



<p class="wp-block-paragraph">-공연평론가∙연극학 연구자 홍서아&nbsp;</p>
</div>
</div>



<p class="wp-block-paragraph"><strong>연극〈잠들고 싶지 않아!〉</strong><br>2026 아시테지 국제여름축제 <br>2026.07.23.–07.26.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br>드락 씨어터(Drak Theater) / 연출∙안무 베로니카 폴다우프 리들바우호바(Veronika Poldauf Riedlbauchová) </p>



<p class="wp-block-paragraph"></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b%8b%a8%ed%8f%89-%ec%9e%a0%eb%93%a4%ea%b3%a0%ec%8b%b6%ec%a7%80%ec%95%8a%ec%95%84/">[단평] 연극 잠들고 싶지 않아!</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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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단평] 연극 없는 잘못</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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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김소정]]></dc:creator>
		<pubDate>Wed, 29 Jul 2026 12:57:5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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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wp-block-ima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375"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26009508_p-375x500.gif" alt="26009508 p" class="wp-image-4336" title="[단평] 연극 없는 잘못 9"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26009508_p-375x500.gif 375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26009508_p-225x300.gif 225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26009508_p-150x200.gif 150w" sizes="auto, (max-width: 375px) 100vw, 375px" /></figure>
</div>



<div class="wp-block-column is-vertically-aligned-center is-layout-flow wp-block-column-is-layout-flow" style="flex-basis:50%">
<p class="wp-block-paragraph">사건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책임의 소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유가족이 반드시 선하지 않다는 이유로 어떠한 책임도 물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 과정에서 무대 위를 뒤덮은 블랙박스는 미로이자 기록장치처럼 끊임없이 의미를 변주한다. 과거 텔레비전이 블랙박스로 불렸던 것처럼, 그 자리는 이제 AI에 의해 대체되었고 우리는 더욱 깊은 블랙박스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현대의 비극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연출은 콩트의 형식과 적절한 음악을 접목해 분위기를 재치 있게 환기하고, 그 간극은 오히려 비극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한다. 특히 &#8220;세상이 왜 이래&#8221;를 반복하는 나훈아의 &#8216;테스형!&#8217;은 웃음을 유발하는 유행가를 넘어, 끝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사회 전체가 내뱉는 공허한 탄식처럼 울린다.</p>



<p class="wp-block-paragraph">-공연∙뮤지컬 평론가 김소정<br><br><br><a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c%97%86%eb%8a%94%ec%9e%98%eb%aa%bb/" data-type="post" data-id="4553">비평 보러가기</a></p>
</div>
</div>



<p class="wp-block-paragraph"><strong>연극〈없는 잘못〉</strong><br>2026.07.14.–07.26. 미아리고개예술극장<br>창작집단 양산박 / 작 윤주호 / 연출 장진웅 / 드라마터그 오판진 </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b%8b%a8%ed%8f%89-%ec%97%86%eb%8a%94%ec%9e%98%eb%aa%bb/">[단평] 연극 없는 잘못</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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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올라오스, 그 이름이 묻는 것 – 섬으로간 나비 〈이올라오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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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김소정]]></dc:creator>
		<pubDate>Sun, 26 Jul 2026 23:30:00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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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class="wp-block-paragraph">연극 &lt;이올라오스&gt;(극작 천성진, 연출 박고은)는 테베의 신성부대의 마지막 전투였던 카이로네이아 전쟁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멜라스(김준식), 아가토(신수빈), 피론(정태영)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카이로네이아 전투는 테베의 신성부대가 대부분 전멸한 전투로 기록된다. 신성부대는 150쌍, 300명의 남성 연인으로 이루어진 정예 보병대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의 맹세는 헤라클레스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였던 이올라오스의 무덤 앞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작품은 이들의 맹세 장소였던 이올라오스의 무덤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이때 후대에는 헤라클레스와 이올라오스의 관계를 연인으로 해석하는 전승 역시 이어졌고, 이올라오스는 ‘함께 싸우는 자’, ‘끝내 남아 기억하는 자’의 상징이 되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흥미로운 것은 본 작품이 ‘이올라오스’를 제목으로 삼으면서도, 정작 무대 위에 이올라오스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이 단어를 발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올라오스’는 처음부터 부재한다. 그리고 그 부재한 자리를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피론에게 이어진다. ‘증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피론의 기도’는 단순한 엔딩의 여운이 아니다. 이는 제목이 처음부터 예비해 둔 결말이다. 살아남아 기억하는 자, 죽음 이를 대신해 증언하는 자. 이 극은 처음부터 이올라오스라는 자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세 인물의 이름 역시 이러한 구조를 미리 암시한다. 멜라스는 그리스어 μέλας(mělas)로 ‘검다’, ‘어둡다’를 뜻하고, 아가토는 ‘좋음’, ‘선함’을 의미하는 ‘아가토스(ἀγαθός, agathǒs)’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피론은 불을 뜻하는 ‘퓌르(πῦρ, pür)’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문자 그대로 불꽃을 품은 존재다. 어둠과 선함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 그러나 불은 어느 한쪽의 편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을 밝히기도 하고, 선마저 태워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극은 세 인물의 이름만으로도 권력과 윤리, 그리고 변화의 삼각구도를 이미 설계해 두고 있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연대와 사랑 사이에서</strong></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700x467.jpg" alt="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 class="wp-image-4324" title="이올라오스, 그 이름이 묻는 것 – 섬으로간 나비 〈이올라오스〉 10"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멜라스문성일아가토김서환-2048x1366.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섬으로 간 나비</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연대’는 보통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자주 호출되어 왔다. 이 작품을 단순히 연대의 서사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아가토와 멜라스의 과거, 그리고 아가토와 피론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는 끔찍한 전쟁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아픔을 나누며 기대고, 위로받고 싶었던 감정에 기반한 전쟁의 참사 속에 피어난 사랑이자 동시에 군인들의 연대로 읽히기도 한다.</p>



<p class="wp-block-paragraph">고대 그리스에서 시민은 오직 남성이었고, 여성과 노예, 이방인은 공동체의 바깥에 놓여 있었다. 신성부대는 바로 그 협소한 시민 공동체 안에서 탄생한 군대였다. 그들에게 전쟁은 국가를 위해 추상적 명분을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곁에 선 자신의 연인을 지키는 일이었다. 사랑은 전쟁의 부수적인 감정이 아니라 전투를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직접적인 동기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성부대의 사랑은 단순한 로맨스로 환원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연대이기도 한 것이다.&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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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3 class="wp-block-heading"><strong>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strong></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700x467.jpg" alt="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 class="wp-image-4326" title="이올라오스, 그 이름이 묻는 것 – 섬으로간 나비 〈이올라오스〉 11"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정태영아가토신수빈-2048x1366.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섬으로 간 나비</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사람들에게 전쟁 영웅이라 칭송받는 멜라스는 전쟁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순수한 청년 피론까지 유흥 거리로 소비하기에 이른다. 이런 그의 모습에 아가토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멜라스와 아가토는 연인 사이이지만, 멜라스가 그를 대하는 태도는 실질적으로 권력과 위계가 지배하는 관계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가토는 점점 답답함을 느끼고, 그의 세계에 피론이 우발적으로 들어온다. 오래전부터 아가토를 존경해 왔음을 고백하는 피론 앞에서, 아가토는 비로소 숨을 내쉰다. 멜라스의 통제 아래 있던 아가토가 피론이라는 불꽃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다. 어둠(멜라스)에 있던 선(아가토)이 불꽃을 통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스스로를 계속 정화하는 모습에서 세 인물의 의미가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멜라스가 아가토에게 행사했던 억압도, 종국에 아가토가 피론을 전장에서 탈출시키는 선택도 표면적으로는 모두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는 상대를 자신의 곁에 붙들어두려는 소유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는 사랑이다. 극은 이 둘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사랑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쉽게 통제의 언어로 억압의 족쇄이자 정당성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를 환기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서로 다른 두 형태의 사랑은 결국 멜라스와 아가토 각자의 죽음으로 완결된다. 아가토는 오래전부터 전쟁에서 벗어나기를 꿈꿨다. 멜라스 역시 한때 함께 떠나자고 말했지만 끝내 실행하지 않는다. 결국 아가토는 자신은 맹세로 인하여 벗어날 수 없는 전장에서 피론만을 떠나보낸 채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 앞에 멜라스는 그를 향한 뒤틀린 감정을 쏟아내며 적의 칼에 숨을 거둔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전쟁에 집착하던 멜라스의 숨은 끊어지고, 전투가 끝난 후 유일하게 숨을 쉬고 있는 인물은 피론 뿐이다. 아가토와 숨결을 나눴던 피론만이 유일한 생존자가 됨으로써 피론은 아가토의 숨을 자양분으로 살아남아 그 숨을 이어 나간다. 극은 이것이 가능한 이유를 피론의 신분에 근거한다. 천민인 그는 처음부터 신성부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만큼 맹세와 명예의 체계 바깥에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다른 군인들과 달리 도망칠 수 있었다. 신성부대 안에 있었지만, 온전히 속해 있지 않았기에 피론은 그 체계와 함께 죽지 않은 것이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6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700x467.jpg" alt="피론윤여백" class="wp-image-4325" title="이올라오스, 그 이름이 묻는 것 – 섬으로간 나비 〈이올라오스〉 12"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700x467.jp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300x200.jp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150x100.jp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768x512.jp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1536x1024.jp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피론윤여백-2048x1366.jp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섬으로 간 나비</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멜라스와 아가토는 서로 다른 신념을 품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맹세와 명예라는 동일한 질서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사랑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끝내 자신을 구속한 질서를 넘어설 수 없었던 삶의 구속구이기도 하다. 반면 피론은 맹세하지 않았기에 살았다. 그러나 그의 생존은 보상이 아니다. 이는 새로운 의무의 시작이다. 그는 살아남았기 때문에 기억해야 하고, 기억하기 때문에 증언해야 한다. 이 순간 피론은 더 이상 한 명의 병사가 아니다. 부재했던 이올라오스의 자리를 이어받은 존재가 된다. 이에 처음 신에게 기도하며 등장했던 아가토의 자리를 이어받아 그 자리에 피론이 서게 된다. 이 결말을 통해 연극 &lt;이올라오스&gt;는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왜 지금 신성부대인가</h3>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389"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700x389.png" alt="스크린샷 2026 07 27 오전 2.34.04" class="wp-image-4327" title="이올라오스, 그 이름이 묻는 것 – 섬으로간 나비 〈이올라오스〉 13"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700x389.pn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300x167.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150x83.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768x427.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1536x854.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스크린샷-2026-07-27-오전-2.34.04-2048x1139.pn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김소정</figcaption></figure>
</div>


<p class="wp-block-paragraph">본 공연이 2300년 전 테베의 신성부대를 다시 불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와 안보, 명분이라는 거대한 언어가 희생을 정당화해 온 세월 속, 이 극은 전쟁의 동력을 국가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도 되돌린다. 신성부대의 역설은 가장 사적인 사랑이 가장 강한 공적 결속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때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쟁의 참혹함이 아니다. 작품은 한때 효율적인 전략처럼 보였던 사랑을 기반으로 한 군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이 극단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통제로 변하고, 도구가 되며, 혹은 반대로 누군가를 해방하는 힘이 되는지를 추적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다만 이러한 구조가 온전히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했다. 바로 아가토와 멜라스 간 사랑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극은 두 사람의 사랑과 죽음에 대해서는 보여주지만, 그 사랑이 형성되어온 시간은 거의 비워둔다. 무엇이 두 사람을 서로에게 이끌게 했는지, 왜 하필 이 둘이어야 했는지가 끝내 충분히 제시되지 않는다. 관계의 균열은 선명할수록, 균열 이전의 결속 역시 선명해야 한다. 사랑의 시작이 비어 있을 때, 사랑의 끝 역시 다소 성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p>



<details class="wp-block-details is-layout-flow wp-block-details-is-layout-flow"><summary>글/공연∙뮤지컬 평론가 김소정</summary>
<p class="wp-block-paragraph">제4회 국립극장 젊은공연예술평론가상 장려상 수상<br>서울대학교 공연예술학전공 석사 졸업 및 박사 수료</p>



<p class="wp-block-paragraph">뮤지컬을 중심으로 공연예술 연구와 평론을 하고 있다. 한국경제 &lt;아르떼&gt;에 &#8216;김소정의 무대 밖 뮤지컬&#8217;을 연재하고 있으며, 이외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최근 드라마터그로도 활동하고 있다.</p>
</details>



<p class="wp-block-paragraph"></p>



<p class="wp-block-paragraph">&#8211;<br><strong>연극 〈이올라오스〉</strong><br>2026.06.21.-09.06. 예스24아트원 3관<br><strong>제작</strong> (주)섬으로간나비 / <strong>작</strong> 천성진 / <strong>연출</strong> 박고은</p>



<div class="mzb-button mzb-button-4df3b8bb "><a class="mzb-button-link is-medium is-style-filled" href="https://ticket.yes24.com/Perf/58448" target="_blank" rel="noopener">예매하기</a></div>



<p class="wp-block-paragra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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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8211; 브러쉬씨어터 〈플리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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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CDATA[홍서아]]></dc:creator>
		<pubDate>Wed, 08 Jul 2026 10:51:54 +00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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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블랑쉬와 플리백: 80년을 건너 만난 이란성 쌍둥이 1947년 미국. 한 여자가 뉴올리언스에 도착해서 이런 대사를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46;&#46;&#46;</p>
<p>게시물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ec%97%b0%ea%b7%b9-%ed%94%8c%eb%a6%ac%eb%b0%b1/">[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8211; 브러쉬씨어터 〈플리백〉</a>이 <a rel="nofollow" href="https://saicriticism.com">사이:비평</a>에 처음 등장했습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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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57"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700x457.png" alt="dfdf" class="wp-image-4277" title="[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 브러쉬씨어터 〈플리백〉 14"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700x457.pn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300x196.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150x98.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768x502.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1536x1003.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dfdf-2048x1338.pn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ure>
</div>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블랑쉬와 플리백: 80년을 건너 만난 이란성 쌍둥이</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1947년 미국. 한 여자가 뉴올리언스에 도착해서 이런 대사를 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공동묘지행 전차로 갈아탄 뒤, 여섯 블록을 더 가서 엘리시안 필즈에서 내리라고 했어요”.&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욕망’이라는 전차는 공동묘지를 거쳐 엘리시안 필즈에 도착한다. 그러나 낙원을 뜻하는 그 지명은 블랑쉬에게 구원이 아니라 정신적 붕괴의 종착역이 된다. 2013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이 비슷한 결을 지닌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피비 월러-브리지(Phoebe Waller-Bridge)의 &lt;플리백&gt;(Fleabag)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블랑쉬도 플리백도 도착한 곳은 모두 관계의 폐허다. 두 인물에게 섹스는 각각 ‘사랑받고 싶다’와 ‘연결되고 싶다’는 욕망의 도착점이다. 블랑쉬는 누군가는 나를 사랑해줄 것이라는 환상 속에 살고, 플리백은 자신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살아간다. 블랑쉬는 자신의 붕괴를 환상으로 덮고, 플리백은 알면서도 자기파괴의 행위를 반복한다. 타인의 시선 속에 사는 블랑쉬와 타인의 시선은 알지만 계속 부수는 플리백. 모르면서 혹은 알면서 하는 자기파괴와 혐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두 인물에게 섹스는 욕망이 아니라 증상이다. 그것은 관계를 상실한 몸이 관계를 대신하기 위해 선택한 자기파괴의 방식이다. 80년이라는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은 관계의 상실을 몸으로 견디려 한다는 점에서 서로를 비춘다.</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보이는 몸과 소모되는 몸: 도덕과 윤리의 경계</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우선 분명히 할 것이 있다. &lt;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gt;와 &lt;플리백&gt;에서는 섹스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섹스’는 관계를 탐하는 인물의 방식으로 제시된다. 블랑쉬와 플리백 모두 관계를 욕망해서 침대에 오르지만, 끝내 도착하지 못하는 곳은 바로 ‘관계’다. 즉 두 인물 모두 실패한 것은 섹스가 아니라 관계인 것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블랑쉬는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요조숙녀’로 연출한다. 그녀는 늙음을 어두운 조명으로, 화려한 옷과 향수로 포장한다. 나이가 적건, 많건 어느 남성에게도 매력적인 여성으로 보이기를 원하는 블랑쉬. 그녀는 처음 만난 날에도 제부인 스탠리에게 샤워 후, 드레스 지퍼를 올려달라고 하며 여성성을 드러낸다. 게다가 고향인 벨 레브에서 교사로 지낼 당시 17세 학생과 관계를 갖는 등 도덕적 경계를 넘는다. 블랑쉬에게 결점은 미성년자 성 착취에서 타인과 자신을 파괴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이것이 사랑받기 위해 블랑쉬가 선택한 도덕적 파열이자 비극적 결점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의 이유가 남편 앨런의 동성애와 자살이었다고 해도 말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플리백은 모두 성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이 관계들은 친밀함보다 공허를 잊기 위한 반복 행위에 가깝다. 그녀는 타인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보다, 자신을 자발적으로 내어주는 관계 속으로 반복해서 들어간다. 성도착적 페티시를 강요하는 전 남자친구, 하룻밤 상대로 항문 섹스를 유도하는 남성, 가슴을 만진 형부까지 플리백이 만나는 남성들 대부분은 그녀를 온전한 인격보다 성적 대상으로 소비한다. 남성들은 관계를 약속하거나 지속하지 않고, 플리백 역시 관계를 지속할 힘을 잃은 채 섹스와 자위를 반복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사실 도덕적으로 플리백의 선택은 결점이 없다. 자기파괴가 범죄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녀는 타인을 파괴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반복해서 소모한다. 이 지점에서 플리백은 윤리적 경계를 넘는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윤리적 선택에서 플리백은 자기혐오에서 비롯한 자기소모의 결점을 가지기 때문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처럼 두 인물은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만, 몸을 사용하는 방식은 다르다. 두 인물 모두 관계를 갈망하지만, 블랑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랑을 구하고, 플리백은 자기 자신을 소모하며 연결을 구한다. 블랑쉬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섹스를 반복하고, 플리백은 자기혐오를 견디기 위해 섹스를 반복한다. 즉 블랑쉬는 ‘보이는 몸’을 만들고, 플리백은 ‘소모되는 몸’을 만든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 지점에서 두 인물의 차이가 드러난다. 블랑쉬가 넘는 것은 사회가 정한 도덕의 경계다. 미성년자와의 관계, 교사로서의 책임, 당대 공동체의 규범을 위반한 그녀의 선택은 사회적 심판의 대상이 된다.반면 플리백이 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윤리의 경계다. 자기존중이 없는 관계, 자기혐오, 자기기만은 법으로 처벌되지 않지만, 스스로를 끊임없이 파괴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따라서 블랑쉬에게 던질 질문은 ‘타인에게 무엇을 했는가’이고, 플리백에게 던질 질문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이다. 블랑쉬의 비극이 사회적 도덕의 심판에서 비롯된다면, 플리백의 비극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무너진 윤리의 문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이는 몸은 사회의 도덕적 시선 앞에 놓이고, 소모되는 몸은 자기 자신의 윤리적 시선 앞에 놓인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관계 상실의 장: 처벌자와 징벌방</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두 작품의 주된 공간인 스텔라의 집과 부의 카페는 소유의 장이 아니라 관계의 장이다. 블랑쉬도 플리백도 끝내 공간 안에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 관계가 무너질 때 공간 역시 함께 상실한다. 다만 블랑쉬는 타인에 의해 축출되고, 플리백은 스스로 떠나지 못한 끝에 공간을 잃는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벨 레브를 잃은 블랑쉬는 플라밍고 호텔에서 관계의 상실을 일시적 성관계로 메우려 했다. 플라밍고 호텔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관계의 상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장소다. 그러나 그 경험은 현실을 회복하기보다 환상이 현실을 대신할 수 없음을 거듭 확인하게 만든다. 이후 블랑쉬가 도착한 스텔라의 집은 그 상실을 되돌려 보려는 마지막 시도가 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스텔라의 집 역시 블랑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집의 실질적 주인인 스탠리는 블랑쉬의 과거 잘못을 심판하고, 폭로한다. 게다가 스탠리는 스텔라가 출산하는 날, 이 집에서 블랑쉬를 강간한다. 스탠리가 블랑쉬에게 가하는 성적 폭력은 그녀의 태도에 근거한 당연함이 아니라 그만큼 가혹하고 잔인한 사회적 폭력이기도 한 것이다. 더불어 이 장면은 블랑쉬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결정적 순간이자 현실의 붕괴가 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 집에서 스탠리는 블랑쉬에게 가부장적 도덕 질서를 집행하는 처벌자이자 사회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의 대리인으로 존재한다. 블랑쉬는 다시 찾은 삶의 공간에서 축출되고, 끝내 정신병원이라는 감시와 수용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블랑쉬의 이동은 사회적 시선이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결국 감시와 수용의 공간만이 그녀를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nbs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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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445"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700x445.png" alt="image" class="wp-image-4278" title="[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 브러쉬씨어터 〈플리백〉 15"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700x445.pn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300x191.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150x95.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768x488.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1536x976.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image-2048x1302.png 2048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홍서아</figcaption></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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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p class="wp-block-paragraph">이에 비해 플리백의 집은 사적 공간이자 은밀한 처벌 공간이다. 혼자 자위하고, 술 마시고, 남성들에게 소비당하는 사적 징벌방이자 독방이다. 공적 공간인 카페는 절친한 친구인 ‘부(Boo)’와 함께 한 공간이었지만, 부가 죽은 후 카페는 속죄의 공간이 된다. 애착이 없는 기니피그 힐러리가 있고, 손님에게 즉석식품을 데워 제공하는 등 실질적으로 운영할 이유가 없는 파산 직전의 카페. 즉 일상적 노동의 공간이 아니라 속죄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플리백은 이 공간에 매일 출근하면서 기니피그 힐러리를 돌보며 부에게 저지른 자신의 죄를 곱씹는 의식을 되풀이한다. 카페를 떠나는 것은 부를 떠나는 일이며, 죄책감을 내려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플리백은 파산 직전의 카페를 끝내 떠나지 못한다. 카페는 생계의 공간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부과한 징벌방이기 때문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 징벌방에서 플리백은 자기 자신을 훨씬 냉정하게 인식한다. 그녀의 자기 인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기니피그 힐러리의 죽음이다. 지하철 남자가 힐러리를 두세 차례 걷어차고 떠난 뒤에도 플리백은 곧바로 힐러리를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또다시 자기처벌의 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고통에 이빨을 부딪치는 힐러리를 제 손으로 압사시키며 오열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힐러리는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니다. 작고 연약하며, 돌봄이 필요하지만, 타인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는 존재다. 더불어 힐러리는 상처와 죄책감을 비추는 플리백의 또 다른 자아로 읽힌다. 고통에 떠는 힐러리를 끝내 안아 죽이는 플리백의 행위는 타인을 향한 폭력이라기보다, 끝나지 않는 고통을 멈추고 싶은 자기 자신을 향한 처벌의 전위가 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이 장면은 존을 만나기 전, 자기처벌이라는 방식이 이미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계기다. 부의 카페에서, 부의 반려동물을 제 손으로 죽이는 순간, 플리백은 자기처벌이라는 방식이 끝내 아무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마주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결국 블랑쉬는 사회가 만든 처벌의 공간으로 추방되고, 플리백은 스스로 만든 징벌방마저 끝내 잃는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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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700" height="395"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700x395.png" alt="s" class="wp-image-4279" title="[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 브러쉬씨어터 〈플리백〉 16"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700x395.png 7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300x169.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150x85.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768x433.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1536x866.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320x180.png 32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520x293.png 52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800x450.png 8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1000x563.png 10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s.png 1992w" sizes="auto, (max-width: 700px) 100vw, 700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홍서아</figcaption></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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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현실의 붕괴와 자기처벌의 균열: 변수의 등장</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블랑쉬에게 마지막 보루였던 스텔라의 집, 그 집에서 만난 미치는 그녀에게 희망의 변수였다. 블랑쉬는 미치의 선택을 기다리며 구원을 바랐지만, 그는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미치 역시 가부장적 도덕과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미치의 거절 이후, 블랑쉬의 세계를 결정적으로 뒤흔드는 변수는 스탠리이다. 스탠리의 성폭력은 그녀의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계기가 아니라, 끝내 환상을 붕괴시키는 사건으로 작동한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그래서 블랑쉬의 인생에 희망이라는 변수는 없다. 결국 그녀는 “나는 언제나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존해왔어요”라며 의사의 손을 잡고 떠난다. 그녀는 정신병원 의사의 친절마저 환상 속으로 흡수한다. 이처럼 블랑쉬는 끝까지 타인의 친절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 믿는다. 미치에게는 사랑을, 낯선 의사에게는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블랑쉬가 만나는 모든 타인은 기존의 질서를 반복하거나 수행할 뿐, 그녀의 세계를 바꾸는 변수는 되지 못한다. 심지어 스탠리는 그녀의 환상을 무너뜨릴 뿐 새로운 가능성은 열어주지 못한다. 1947년 블랑쉬는 변수를 기다렸지만, 시대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3년 플리백은 자기 세계를 흔드는 변수를 만난다.</p>



<p class="wp-block-paragraph">플리백에게 가장 잔인한 것은 거절이 아니라 거절당하지 않는 일이다. 플리백은 이미 욕망받을 준비, 소비될 준비, 심지어 거절당할 준비도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게임 자체에 참여하지 않는 인물, 즉 변수가 등장한다. 바로 매일 찾아오는 늙은 남자 ‘존’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존은 처음으로 플리백의 몸이 아니라 그녀 자체, 사람을 바라본 인물이다. 플리백이 가슴을 드러내며 만지라고 할 때, 존이 눈을 가리면서 하는 말, “아가… 옷 올리렴”은 몸이 아닌 마음의 상처를 향한 말이다. 이 순간, 플리백의 세계는 오류가 발생한다. 진정한 따뜻함 앞에서는 더 이상 ‘소비되는 몸’이라는 자기혐오의 처벌 뒤로 숨을 수 없기 때문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리백은 마지막까지 익숙한 방식으로 관계를 확인하려 한다. 눈을 가린 존에게 자신을 만지라고 오열하는 플리백의 행위는 친밀함을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이는 자기 자신이 결국 소비되는 존재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의식이다. 존이 그녀를 욕망해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결국 소비되고, 소모되는 몸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던 자기파괴적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를 존이 거부하면서 플리백의 자기처벌에는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다. 이때야말로 플리백은 자기처벌만으로는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순간과 마주한다.&nbsp;</p>



<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h3 class="wp-block-heading"><strong>다시 관계의 문턱에서</strong></h3>



<p class="wp-block-paragraph">두 인물은 모두 섹스를 선택했지만, 실패한 것은 섹스가 아니라 관계였다. 사랑도 연결도 사라진 자리에서, 관계를 대신하려 한 몸의 언어인 것이다. 그러나 관계를 갈망할수록 두 인물은 더욱 깊은 고립으로 향한다. 이들이 반복적으로 얻은 것은 욕망이 아니라 상실이었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블랑쉬에게 잔인한 것은 관계의 상실보다 타자의 시선이다. 그녀를 가장 깊이 무너뜨린 것은 타인의 시선을 자기 안으로 밀어 넣은 일이다. 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한 그녀의 상황, 그녀를 받아들이지 못한 시대적 현실은 환상 속으로 퇴각하게 만든다. 현실의 수정이 아니라, 현실 자체 견디지 못한 채 환상으로 그것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nbsp;</p>


<div class="wp-block-image">
<figure class="aligncenter size-large is-resized"><img loading="lazy" decoding="async" width="598" height="500" src="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598x500.png" alt="a" class="wp-image-4280" style="width:598px;height:auto" title="[비교비평] 블랑쉬와 플리백: 섹스라는 증상, 관계의 예후 - 브러쉬씨어터 〈플리백〉 17" srcset="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598x500.png 59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300x251.png 30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150x125.png 150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768x643.png 768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1536x1285.png 1536w, https://saicriticism.com/wp-content/uploads/2026/07/a-2048x1713.png 2048w" sizes="auto, (max-width: 598px) 100vw, 598px" /><figcaption class="wp-element-caption">사진 ⓒ홍서아</figcaption></fig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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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wp-block-group is-nowrap is-layout-flex wp-container-core-group-is-layout-8f761849 wp-block-group-is-layout-flex"></div>



<p class="wp-block-paragraph">플리백의 경우 잔인한 것은 섹스가 아니었다.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위로가 바로 잔인한 현실 직시였다. 그때야말로 플리백은 위로가 필요한 여성이자, 따뜻한 관계 맺음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로 벌거벗는다. 그녀가 쌓아온 엉망인 일상과 망가진 관계로 점철된 세계관이 무너지는 것이다. 가벼운 농담으로 회피하려던 플리백의 시나리오는 몸을 거부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보는 시선에 무너진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플리백의 처음과 마지막 공간은 ‘면접장’으로 일관된다. 이때 면접관이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까요?”라는 말에 플리백은 “퍽큐!”(fuck you)라고 응수한다. 플리백의 마지막 말인 ‘퍽큐’는 자기와의 관계가 바뀌는 전환점이자, 더 이상 타인의 평가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이제 그만하겠다’는 자기 고발의 종료인 것이다. 이때야말로 플리백은 처음으로 타인과의 관계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남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섹스의 실패라는 공통점에서 출발해서, 블랑쉬는 그 실패를 끝까지 실패인 줄 모르고, 플리백은 실패인 줄 알면서도 지속하다가 어느 순간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다. 같은 폐허에서 한 명은 환상 속에 머물렀지만, 한 명은 폐허를 직시하며 걸어 나올 가능성을 남긴다. 환상으로 관계를 대신한 블랑쉬, 자기처벌로 관계를 대신한 플리백. 80년을 사이에 둔 두 여성은 섹스라는 같은 증상을 앓았지만, 서로 다른 예후를 남긴다.&nbsp;</p>



<p class="wp-block-paragraph"></p>



<div class="wp-block-group"><div class="wp-block-group__inner-container is-layout-constrained wp-block-group-is-layout-constrained">
<div class="wp-block-columns is-layout-flex wp-container-core-columns-is-layout-8f761849 wp-block-columns-is-layout-flex">
<div class="wp-block-column is-layout-flow wp-block-column-is-layout-flow" style="flex-basis:100%">
<details class="wp-block-details is-layout-flow wp-block-details-is-layout-flow"><summary>글/ 공연평론가∙연극학 연구자 홍서아<br></summary>
<p class="wp-block-paragraph">제4회 국립극장 젊은공연예술평론가상 우수상 수상 <br>한양대학교 예술학부 연극학 박사<br>現 호서대학교 연극트랙 겸임교수</p>



<p class="wp-block-paragraph">배우를 꿈꾸던 10대, 무대를 흠모했던 20대, 무대를 그리워했던 30대를 거쳐 무대를 기록하는 현재. 가까이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끝까지 따라가는 시선을 갖게 되었다. 개인의 기억과 역사적 사건이 무대 형식과 미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탐구하며,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사이에서 무대를 읽는다. </p>
</deta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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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div>



<p class="wp-block-paragraph">&#8211;<br>연극 &lt;플리백&gt;<br>2026.06.19~2026.09.06<br>두산아트센터 연강홀<br>작 피비 윌러 브리지 연출 류수연 번역∙윤색 조민형<br></p>



<div class="mzb-button mzb-button-11c3cab9 "><a class="mzb-button-link is-medium is-style-filled" href="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6006445" target="_blank" rel="noopener">예매하기</a></div>



<p class="wp-block-paragra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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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enco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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