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그림자에서 주체의 빛으로: 〈쉐도우〉가 다시 쓴 임오화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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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쉐도우>는 임오화변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을 록의 언어로 다시 쓰며, 역사적 비극을 동시대적 질문으로 전환한다. 사도 세자가 뒤주에 갇힌 1762년 7월 3일부터 죽음을 맞는 7월 12일까지의 10일 동안, 작품은 여섯 번의 타임슬립을 통해 사도와 영조가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시간의 뒤틀림 속에서 사도는 연잉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영조의 여러 얼굴을 마주하고, 영조 또한 사도의 삶과 죽음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쉐도우>는 이미 결말이 정해진 역사적 사건의 시간을 되감으며, 그 비극의 의미를 새롭게 질문한다.

록의 언어로 다시 쓰인 임오화변

한국 창작뮤지컬에서 한국의 역사적 사건과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작품은 익숙하다. 그러나 <쉐도우>에 주목할 만한 이유는 사건의 재현이나 숨겨진 서사의 발굴에 머물지 않고, 사도와 영조를 ‘록 스타’의 형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에 있다. 록은 1960년대 후반 브로드웨이 이후 사회 질서에 저항하고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의 형식으로 자리 잡아왔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저항과 해방의 감정을 대표하는 장르로 기능한다. 그렇기에 <쉐도우>가 임오화변을 록 뮤지컬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은 단순한 현대화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사도와 영조의 갈등을 과거의 부자 비극에 한정하지 않고,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구조적 폭력과 개인의 저항이라는 동시대적 문제로 확장하기 위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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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테이지

인물들의 음악적 배치 속에서 이러한 장르적 선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사도의 넘버들은 주로 이모(emo)의 문법을 따른다. 이모(록)는 록의 에너지 위에 감정의 직접성과 취약성을 얹는 장르로, 억압된 내면을 날것 그대로 분출하는 사도의 인물성과 긴밀하게 맞닿아 있다. 반면 영조에게 배치된 하드 록(hard rock)은 강렬하고 공격적인 사운드를 통해 권력자의 외양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 단단한 외피 아래 감춰진 균열과 불안을 드러낸다. 흥미로운 것은 타임슬립을 거치며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들이다. 이때 음악은 발라드와 팝의 언어로 전환되며 록의 긴장을 잠시 풀어내고, 억압된 감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더 나아가 두 사람이 함께 노래하는 장면에서 스며드는 R&B적 색채는 갈등의 관계를 이해의 관계로 이동시키는 음악적 징후로 기능한다. 즉 <쉐도우>에서 음악은 단순한 정서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과 관계의 변화를 서사적으로 조직하는 핵심 장치다.

이러한 음악적 전략은 극의 두 번째 넘버 ‘ROCK STAR’에서 가장 응축된 형태로 드러난다. 사도가 스스로를 ‘록 스타’로 호명하고, 이후 전개되는 세 번째 넘버 ‘운명을 봐’에서 영조 역시 록 스타의 형상으로 등장하는 순간, 두 인물은 더 이상 조선시대의 역사적 개인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록 스타란 본래 기존 질서와 규범에 저항하며 자기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는 문화적 형상이라는 점에서, <쉐도우>가 이들에게 록의 외피를 입힌 선택은 곧 인물의 존재 방식을 새롭게 규정하는 선언이 된다. 작품 속 영조는 아버지인 동시에 국가 권력의 화신으로 기능하며, 적통과 왕권이라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도를 끊임없이 규율하고 통제한다. 이에 사도는 단순한 비운의 세자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성과의 질서에 끝내 편입되지 못한 개인의 표상이 된다. 결국 <쉐도우>의 임오화변은 과거의 비극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능력주의와 성과주의의 이름으로 개인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자기 검열하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끝내 그 기준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우리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비극의 주인공에서 주체적 인간으로

임오화변은 이미 수많은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현됐다. 그러나 사건의 중심에 있던 사도 세자가 서사의 주체로 전면화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드라마 <비밀의 문>(2014)이 사도를 개혁 군주의 가능성으로 그려냈다면, 영화 <사도>(2015)는 강압 속에서 무너져가는 개인으로서의 사도에 집중했다.

이러한 재현의 계보 속에서 <쉐도우>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작품 속 사도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자 하는 존재로 재구성된다. ‘사도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결말은 바뀌지 않지만, 타임슬립이라는 장치를 통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변주된다. 중요한 것은 죽음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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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테이지

이러한 주제 의식은 마지막 넘버 ‘Stay with me’에서 집약된다. 사도가 관객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누군가 너에게 상처 내도 눈물 흘리지 마”라고 노래하는 장면은 자신의 죽음을 단순한 비극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체제 속에서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의 마지막 고백이자, 동시에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타인들에게 보내는 위로로 기능한다. 여기서 사도의 죽음은 더 이상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체제 속에서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남고자 했던 존재의 마지막 저항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그의 마지막 모습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비운의 왕자가 아니라, 끝내 스스로 빛을 만들어낸 별로 남는다.

뒤주와 옥추경, 시간을 다시 쓰는 장치들

이 과정에서 사도 세자의 죽음의 장소였던 뒤주는 타임슬립의 공간으로 재해석된다. 뒤주는 단지 사도가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으며,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다. 사도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던 공간이자 사도와 영조가 시간을 초월해 만나는 공간이며, 영조에게도 시간을 초월해 만났던 사도와의 추억이 축적되는 공간이다. 동시에 무대 위에는 사도의 뒤주를 형상화한 직사각형의 구조물 이외에도 또 다른 두 개의 뒤주가 존재한다. 가장 작은 것은 사도의 뒤주, 그것보다 큰 것은 영조의 뒤주, 그리고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으나 쉽게 인식되지 않는 마지막 뒤주는 두 사람 모두를 가두고 있는 사회의 뒤주다. 이때 뒤주는 개인의 죽음을 담는 물리적 공간에서 나아가, 개인을 규율하고 억압하는 사회 구조의 은유로 확장된다. 

『옥추경』 또한 중요한 상징이다. 그것은 단순한 타임슬립의 매개체가 아니라, 사도에게 자신의 운명에 저항할 기회를 부여하는 장치다. 사도가 피로 옥추경에 자신의 이름을 적고 찢는 순간마다 시간은 과거와 평행 세계의 미래를 가로지르며, 우연처럼 보이지만 결국 필연으로 귀결되는 순간으로 이동한다. 타임슬립은 사도가 영조의 진심을 알고자 할 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자 할 때 작동한다. 흥미로운 것은 후반부에 이르러 사도에게 받은 두 장의 부적을 통해 영조 역시 이 시간의 이동에 개입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타임슬립이 더 이상 사도의 욕망만이 아니라, 사도를 살리고자 하는 영조의 욕망까지 포함하는 장치로 확장됨을 보여준다. 결국 타임슬립은 단순한 서사적 장치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파국에 도달했던 부자 관계를 다시 쓰고 끝내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그림자의 역전, 주체성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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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테이지

사도와 영조는 이미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영조는 사도를 죽여야 하며, 사도는 영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필연을 말이다. 이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예견된 운명을 피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결국 운명대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사도와 영조 또한 결국 피하지 못한다. 그러나 <쉐도우>는 그리스 고전 비극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사도는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능동적으로 선택한다. 작품은 타임슬립이라는 장치를 통해 사도를 비극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주체적 존재로 격상시킨다.

그렇다면 왜 이 작품의 제목은 ‘쉐도우’일까. 사도와 영조는 반복해서 “No more living in the shadow”를 외치며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표면적으로 보면 사도는 평생 영조의 그림자로 살아온 인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품이 끝날 때 드러나는 것은 그 반대의 진실이다. 영조야말로 끝내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 존재였다. 그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억압했고, 결국 가장 사랑했던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에 복속된다. 사도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끝내 자신의 삶을 선택했고, 영조는 살아남았지만 끝내 자신의 삶을 선택하지 못했다. 결국 <쉐도우>가 말하는 그림자는 사도가 아니라 영조였다. 작품은 말한다. 비극적인 운명이 주어졌더라도 그 안에 침식되지 말고, 눈물을 흘리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쉐도우>는 임오화변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국가와 사회의 억압 속에서 개인의 주체성과 저항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글/ 공연・뮤지컬 평론가 김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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