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공작소 마방진〈리어왕외전〉 리어카로 수렴된 비극
2026년 3월, 국립극장 하늘극장에 리어카를 끄는 왕이 나타났다. 극공작소 마방진의 20주년 기념공연. <리어왕외전>이다. 2012년 초연 이후 네 번째 재연으로 돌아온 이번 공연은 2020년 이후 약 6년 만에 프로시니엄 무대를 벗어나 3/4 아레나 무대 형식으로 관객과 다시 만난다.
20여 년의 시간을 버텨온 극공작소 마방진은 이번 무대에서 무엇을 갱신하고, 무엇을 반복하고 있는가?

셰익스피어의 “슬픈 옛이야기”와 2026년
허허벌판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절규하는 늙은 왕, 리어. 권력자로서의 오만, 아버지로서의 분노, 내면이 무너져 내리는 인간과 자연의 폭력이 대표로 떠오르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고선웅 연출은 ‘허공’으로 바꾸어 놓았다. 셰익스피어의 “슬픈 옛이야기”는 “허공 속에 묻힐” 노년의 씁쓸함으로 맴돈다.
고선웅 연출이 포착한 노년은 분명 21세기 한국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살아생전에 재산을 정리하고 자식에게 이전하지만, 정작 본인은 몸 하나 의탁할 곳 없는 노년. 한편, 외로움과 고독이 오한처럼 스미는 노년의 시간. 또 다른 한편에는 리어카를 끌며 폐지나 재활용품을 줍는 노년의 삶. 은퇴 후 또 먹고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100세 시대, 의학의 성과가 오히려 노년의 시간을 연장하는 부담으로 체감되는 저 너머의 지금. 우리의 미래.
리어와 리어카의 병치는 현재 한국의 노인 현실을 과감히 드러낸다. 리어가 향하는 치킨하우스는 은퇴 후 치킨집을 개업하는 장‧노년층뿐만이 아니라 부업이라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한국 노년의 씁쓸함이 스며든다. 더불어 다른 노인들의 무덤을 만들고 시체를 나르는 리어의 반복된 움직임에서 마침내 60~70대 요양보호사까지도 스친다. 리어의 리어카는 노동의 도구이자 생존의 무게, 나아가 죽음을 운반하는 비참한 노년을 상징한다. 돌봄을 받고, 요양할 시기에도 여전히 노동해야만 하는 노인의 삶 말이다.
<리어왕외전>이 제시하는 이미지는 선명하지만, 그 이해가 곧 삶의 필연으로 체화되기보다 하나의 도식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젊은 시절 차를 몰고, 삶이 안정되면 유모차나 개모차를 끌며, 끝내는 리어카를 끄는 존재가 되는 것일까? 왜 ‘노년’을 이렇게 선택적으로 구성했는가?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극이 재현하는 궁핍과 소외가 2026년 노년의 보편적 풍경이라 확언하기에는 삶의 스펙트럼이 이미 세대 내부에서도 분화될 만큼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임영웅, 송가인 콘서트를 ‘피켓팅’으로 ‘겟’하며 조공하는 노년 세대, 더 이상 자식에게 기대기보다 스스로 노후를 준비하며 자존감을 드러내는 노년 세대, 은퇴 후 40년,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적극적 노인의 시대인 액티브시니어(Active Senior), 욜드(YOLD)세대 시대로 이미 진입했다. 이에 비해 <리어왕외전>은 여전히 2012년 시니어의 정서이자 헌신 후, 빈곤과 궁핍, 고독과 소외라는 단일한 전통적 프레임을 작품 전체의 분위기로 삼는다.
이 지점이 재공연 작품이자 레퍼토리인 <리어왕외전>에서 아쉬운 점이다. 고선웅 연출이 리어왕을 통해 제시한 노년의 삶은 한 단면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노년의 다층적 시간과 감각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 초점이 곧 전체인 것처럼 제시되는 순간, 삶의 복합성과 다층성이 확장되기보다, 특정한 정서로 수렴되는 인상을 남긴다.
오락적 리듬이 남긴 2%의 간극
이영석 배우의 리어. 이영석 배우는 막내딸을 편애하는 아버지를 전혀 숨길 생각이 없는 철없는 아빠. 권력과 유산을 내세우며 자식에게 큰소리치고 싶지만, 탈탈 털린 아버지, 이미 근육이 빠진 사지육신을 끌기도 힘든 할아버지. 관절이 이미 닳고 닳아 종종걸음치고, 초라해져 가는 리어를 묵직하게 연기한다. 특히 이영석 배우는 춤, 노래 연기뿐만이 아니라 호기롭게 등장한 첫 장면부터 점차 굽어가는 등, 걸음의 변화를 점차 드러내며 쇠락하는 노년의 신체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리어를 제일 닮은 딸, 코딜리어는 아빠를 닮아 자비 없는 솔직함으로 뼈를 때리며 하며 청순가련한 막내딸의 이미지를 떨쳐낸다. 그녀는 공주라는 금수저를 버리고 변두리에서 노동하는 여성으로 재탄생한다. 이지현 배우는 이 직설화법의 코딜리어를 자칫 철없이 보일 위험에서 선택에 책임감이 있는 여성으로 구해낸다.
각색과 연출을 담당한 고선웅은 특유의 재치로 장황한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간결하게 정리한다. 또한 종횡무진 무대를 뛰는 배우들의 동선에서 그의 연출적 기지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동선을 겹쳐 다른 공간을 한 무대에 겹치고 생략하며 장면을 응축하는 고선웅식 미장센은 역시 보는 재미를 더한다.
그러나 장면을 응축, 압축하는 과정에서 상당 부분이 덜어지면서 사건의 밀도는 헐겁게 얽힌다. 그 결과, 개별 장면의 인상은 남지만, 이야기의 긴장과 축적은 흐릿해진다. 한 예로 글로스터 백작의 고문 장면을 들 수 있다.
원작에서 이 장면은 아들의 탐욕을 보지 못한 어리석은 아비의 눈을 도려내는 패륜범죄 장면이다. 아들 에드먼드 대신 리건 부부가 글로스터에게 행하는 폭력은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의 라비니아 장면과 더불어 셰익스피어 작품 중 잔인한 장면으로 꼽힌다.
이 장면을 <리어왕외전>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없는 ‘침묵의 폭력’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압축된 긴장으로 응축되기보다, 늘어진 정적으로 남는다. 그 결과, 이 장면은 잔혹함을 강화하기보다 감각을 무디게 한다. 자녀들의 패륜과 글로스터에 대한 연민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한 채 남기 때문이다.

이번 <리어왕외전>의 네 번째 무대는 앞선 프로시니엄 무대와 달리 3/4 아레나 형태로 이동한다. 그러나 동선은 여전히 프로시니엄 방식에 머물러 있다. 무대 형태의 갱신은 오히려 배우들의 동선과 발성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공간에 맞게 소리가 열리지 못하고, 막히다 보니 관객에게 대사와 에너지가 온전히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대사의 불분명한 전달력과 아직 프로시니엄 동선이 잔존 하는 무대는 고선웅 연출의 특징인 생략, 응축, 압축하는 미장센을 오히려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연극이라는 광야에서 20년을 살아남은 마방진
지금의 대학로는 작품은 남는데, 연극 세계는 남기는커녕 갈 곳조차 마땅치 않다. 연출, 배우, 디자이너 등 개인은 남지만, 극단이라는 공동체는 점차 흐려지고 있다. 물론 명맥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극단도 있다. 반면 극단은 있지만 지속된 작업은 힘든 경우도 적지 않다.
2000년대 이후 대학로의 제작 환경이 프로젝트 중심으로 재편되는 가운데, 오랜 시간 축적된 미학을 유지해 온 극단의 작업은 오히려 드문 사례가 되고 있다. 프로젝트 시스템은 현실적으로 맞는 방식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연극의 시간’이 쌓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극공작소 마방진의 20주년은 더욱 반갑고, 또한 충분히 축하받을 일이다.
연극이라는 광야에서 20년을 버텨온 시간은 이제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요구한다. 그동안 축적된 실험과 미학, 견고해진 연출과 배우의 호흡, 두터워진 관객층은 자연스럽게 더 높은 기댓값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기대는 곧 갱신의 압박으로 되돌아온다. 쌓아온 것이 있기에 이번에도 새로워야 한다는 요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그만큼 극공작소 마방진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큰 무게와 부피를 지닌 채 무대 위에 서 있다.
마방진의 20주년 레퍼토리로 돌아온 <리어왕외전>은 바로 이러한 ‘축적된 미학’과 ‘갱신의 요구’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20년 동안 마방진의 시간은 연출과 배우라는 점(點)들과 극단이라는 선(線), 작품이라는 면(面)으로 그들의 존재를 올곧게 입증한 바 있다. 그 견고함과 활력 앞에 ‘갱신’의 압박을 더 하는 것이 무례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마방진이 마주한 이 긴장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보인다.
글/ 공연비평가・연극학연구자 홍서아
